스파이, 그들이 온다- 적국에 충성 맹세해도…‘외국 위한 간첩’ 행위는 처벌 불가?
스파이 준동에 법령정비 비상
현행법, 다양한 간첩 활동 처벌 못 해
외국대리인 등록법 제정 등 과제 시급
꼼꼼한 법령으로 현대적 위협 대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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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대만의 집권 민진당은 현재의 국가안전법에 문제점이 많다며 개정안을 발의했다. 중국의 대만 침공 시 최선을 다해 돕겠다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군복을 입은 채 이를 들고 사진까지 촬영한 육군대령 샹더언 사례가 중국의 침투공작에 대한 우려와 간첩 관련 법령정비 필요성을 촉발했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샹 대령은 징역 7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지만 현행법은 적국에 충성을 맹세하거나 협력하는 행위의 처벌 규정이 없어 전달받은 2400만 원에 대해서만 뇌물죄로 처벌했다.
2023년 1월에도 중국에 포섭된 퇴역 공군대령이 현역 장교 6명을 활용해 간첩행위를 하다 적발돼 징역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11월에는 10명의 전·현직 장교가 역시 중국을 위한 간첩행위로 적발돼 충격을 줬다. 현행법은 적대 세력을 위해 조직을 창설, 지도, 조정, 자금조달 행위만 처벌하는데 새로운 법안은 단순 참가도 처벌한다고 한다. 비밀을 공개하거나 비밀문서를 복제하는 등 단순 수집 행위에 관한 처벌도 강화하기로 했다.
이런 행위로 자국 정보요원과 그들의 임무 수행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만이 이처럼 간첩행위 관련 법령을 정비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것은 중국의 무력 침공보다 간첩 침투와 영향력 공작 등 정보전 수단에 의한 내부의 무장해제와 친중국화가 더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83년 된 반간첩법 정비하는 필리핀
지난 3월 필리핀에서는 소도시인 밤반시 여성시장 앨리스 궈가 사실은 신분을 위장한 중국인이라는 신원이 들통나 해외로 도피했다가 인도네시아에서 송환된 사건이 있었다.
온라인 도박장과 관련된 범죄 혐의와 함께 중국의 스파이라는 의혹이 일었다. 지난달 초 알자지라 방송이 그녀가 중국 스파이가 맞다는 한 중국인의 증언을 소개하면서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해상경계 분쟁과 미군 미사일기지 설치 등으로 중국과의 마찰이 심화하는 가운데, 지방도시 시장이 중국 스파이라는 의혹은 필리핀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83년 된 낡은 반간첩법을 개정해 간첩 개념을 시대에 맞게 바꾸고 처벌을 강화하자는 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지난달 법안을 제출한 루퍼스 로드리게스 의원은 반간첩법 범위를 넓히고 형량을 높이는 개정안 마련과 더불어 전시에만 간첩죄가 적용되도록 돼 있는 형법 개정도 필요하다며 변화된 글로벌 안보위협에 대응하고, 기술진보와 간첩활동 양상 변화에 대비하는 법령개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개정안은 전시나 계엄령 시 국가안보와 국방에 영향을 주는 비밀정보를 유출하면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국가안보와 관련된 공무원의 반역행위를 처벌하는 규정도 두기로 했다. 평화로운 관광지로 유명하며 외국의 스파이 활동 위협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것 같은 아름다운 섬나라 필리핀에서도 외국의 정보적 위협에 경각심이 고조되고 있다.
영향력 공작 방어수단 확보한 영국
영국은 지난해 7월 국가안전법을 개정해 외국을 위해 일하는 대리인들은 사전 등록하도록 해 외국의 영향력 공작 위협에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2022년 1월 발생한 중국계 변호사 크리스틴 리 사건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영국 방첩기관인 MI5는 중국 공산당과 연계된 여성 변호사가 거액의 기부금을 통해 중진 의원에게 접근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의회에 경고했다. 처벌 법령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미국처럼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관련 내용을 국가안전법에 반영시킨 것이다.
개정 국가안전법의 외국영향력 등록제도(FIRS·Foreign Influence Registration Scheme)는 크게 두 단계로 구성된다. 첫째는 외부의 영향력 행사로부터 영국 정치제도의 안정성과 복원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선거, 정책결정, 정당, 의원 등의 영향력 행사에 관한 것이다. 둘째는 영국의 안보와 국익에 잠재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외국 지시에 따른 행위를 막기 위한 것으로 보다 넓은 범위의 행위가 포함된다. 기본 취지는 외국 정보기관의 영국 내 활동을 신고하지 않고 돕는 행위를 방지하고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다.
부총리 올리버 다우든은 “지난 100년간의 방첩 관련 법 개정 중 가장 중요한 개혁으로 영국 정보기관과 경찰이 진화하는 외국의 위협에 대응할 수단을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 주로 독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법령을 현대적 위협에 대응할 수 있도록 정비한 것이다.
정보전의 무기인 법령정비 서둘러야
우리나라에 가장 큰 정보적 위협을 주는 것은 여전히 북한이다. 최근 몇 년만 하더라도 청주, 제주, 창원 간첩단 사건과 민주노총 간첩단 사건 등을 통해 북한의 지하당 구축 사업과 영향력 공작 시도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문제는 북한의 변함없는 공세에도 우리의 경각심이 너무 약화됐다는 것이다.
북한 지령과 공작금 2만 달러를 받고 ‘자주통일 충북동지회’를 결성, 국가기밀과 국내정세를 보고해 온 혐의로 2021년 9월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이들에 대해 지난달 2심 재판부는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구성원이 4명뿐이라 범죄단체로 볼 수 없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 전복을 기도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며 징역 5년으로 감형했다. 적의 지시를 받고 활동하는 간첩들을 일반 범죄자로 인식하는 듯하다. 캄보디아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한 후 사이버 드보크를 운용하며 13차례 지령문을 수수하고, 14차례 보고한 제주 간첩단은 무죄로 풀려났다. 창원 간첩단 사건은 재판 투쟁으로 공판이 연기되고 있다. 민주노총의 조직쟁의국장 등 핵심 간부 4명이 89회나 북한의 지령을 받고 24건을 암호로 보고하며, 오산 공군기지와 평택 미군기지 촬영 사진과 국회의원 전원의 휴대전화 번호를 북에 넘긴 증거가 쏟아져 나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민주노총의 사과나 변명은 없었다. 국민들도 크게 주목하지 않는 분위기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 북한의 위협을 경시하는 태도가 일반화돼 있어 가장 큰 안보 위협으로 대두되고 있다.
최근 중국 정보기관에 군사정보를 유출한 현역 군인, 정보사 흑색요원 명단 등 군사기밀을 중국인에게 유출한 사건을 간첩죄로 처벌하지 못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형법상 간첩죄가 “적국을 위해 간첩한 자”로 한정하고 있어 “외국을 위한 간첩” 행위가 처벌되지 않는 점이 부각돼 국회가 법 개정을 추진 중인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최근 국가 간 정보전에서 크게 대두되는 외국의 영향력 공작에 대응할 수 있도록 ‘외국대리인 등록법’을 제정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정보전에서 글로벌 트렌드를 잘 읽고 새로운 위협에 대응해 방첩역량을 강화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기가 되는 법령을 예리하게 벼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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