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가을 상념<想念>

입력 2024. 11. 21   16:25
업데이트 2024. 11. 2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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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호 성형외과 전문의 의학박사
김준호 성형외과 전문의 의학박사



황망하게 여름이 떠난 자리에 짙은 안개와 이슬비를 흩뿌리며 가을이 나타났다. 

의대 본과 시절, 기숙사에서 지냈었다. 기숙사 입구에 어른 두세 명의 팔을 합쳐야 할 정도의 둘레를 가진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 고작 나무 한 그루였지만, 가을비라도 한 번 오면 떨어진 노란 나뭇잎이 사방을 온통 뒤덮곤 했었다. 같은 노란색이지만 은행잎의 노랑과 개나리의 노랑은 다르다.

스산해진 이맘때가 오히려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무언가를 해야 무언가가 얻어지는 삶을 반복한 탓인지, 스산하고 차가운 계절이 지나야 밝고 따뜻한 계절이 온다는 조건반사 같은 것이 생겨난 듯하다.

“삶이란 내게 정답표가 뜯겨 나간 문제집과 비슷하다.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정말 맞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이란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김연수는 좋아하는 내 또래의 소설가다. 나와 살아온 시간은 거의 비슷한데, 삶에 관한 고민이 곱절은 돼 보인다.

학창 시절 이후로 삶의 정답 같은 것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먼 앞날이나 뭔가 대단한 것을 고민하면서 살지 못했다. 하루하루에 대응하며 살기 바빴다. 그래서 내가 가는 것인지, 그저 떠밀려 흘러가는 것인지도 구별이 잘 안 될 때가 많다.

가만히 분수를 바라본다. 아래에서 힘차게 튀어나온 물은 자기 바로 위의 물을 밀어 올린다. 그렇게 끊임없이 아랫물이 윗물을 밀어 올린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참 눈물겹다. 혹시 그런 것이었나? 살아간다는 것, 생명을 이어간다는 것이 힘차게 쏟아져 내려 바닥에 닿는 순간 요란하고 웅장하게 그 절정을 찍는 폭포와 같은 게 아니고, 마지막 그 끝에서 힘겹게 기어이 꺾이고야 마는 분수와 같은 것이었나?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듯이 삶의 어디에도 답도 끝도 없는 게 아닐까?

대학에 입학해 첫 학기 중간고사를 볼 때였다. 당시 장학금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당연히 좋은 성적을 받아야 했다. 여러 과목 중에서 특히 수학에 자신 있었기에 첫 수학시험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결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수학과 사무실을 찾아가 확인해 봤다. 객관식에 익숙했던 나의 답안지에는 답만 있고 문제를 푸는 풀이 과정이 없었다. 그래서 감점 처리가 됐던 것이다.

그때 처음 알았다. “아! 답만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 이 새삼스러운 진리를 나의 장학금과 바꾸고야 알게 됐다. 물론 풀이를 다 썼다고 장학금을 받았을지 확실치는 않다.

사실 결과보다 그 과정이 기억에 더 뚜렷히 남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얼굴과 이름은 희미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며 숨이 막히게 애틋했던 순간의 기억과 수고는 여전히 뚜렷할 수 있다. 무언가를 이루려 쏟아부었던 시간이 사실은 삶의 거의 모든 것일 수 있다.

김연수는 같은 책에서 또 말한다. “어린 시절이 지나고 옛일이 그리워져 자주 돌아보는 나이가 되면 삶에 여백이 얼마나 많은지 비로소 알게 된다.” 하얀 백지에 작은 점들을 찍어 새 떼를 만들면, 그 여백이 모두 하늘이 되듯이(이철수의 판화 ‘마음 쏟아지는구나’) 생의 여백이 무엇이 될지는 내가 찍은 점들이 말해 주는 것 아닐까?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처럼 내 삶의 대부분이 여백으로 채워져도 아름다울 수 있다면, 답이라는 거 몰라도 상관없을 것 같다. 그래도 정말 나는 괜찮을 수 있다.

할 일도 많은데 쓸데없는 상념에 자꾸 빠져드는 걸 보니 가을이 오긴 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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