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그때 그 곳 - 삼선평, 첫 신도시
복사꽃·버들 어우러진 평평한 들판
경성 인구 급증하며 주택난 시달리자
신시가지 조성해 경성부 돈암정으로…
조선인이 매입하며 한옥단지 들어서
삼선교~안암동 2만3000보 걷는 동안
70년대 하숙하던 한옥 골목은 없어
푸른눈 이방인에 의해 보존된 옛집서
서운함 달래고 추억 속 삼선평과 작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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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평(三仙坪)은 서울 동쪽 혜화문 바깥의 평평한 들판을 일컫던 지명이다. 북한산을 머리에 이고 동쪽은 개운산, 서쪽은 한양도성, 남쪽은 낙산을 경계로 했다. 지금의 성북구 일대에 해당한다. ‘삼선’이라는 지명은 “세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옥녀봉 봉우리에서 옥녀와 놀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서울지명사전』). 이곳을 흐르는 성북천은 경승이었다. 편히 앉아 쉴 만한 큰 바위가 있어 안암천(安岩川)이라고도 불렀다(『신증동국여지승람』). 하천을 낀 평야 지형이어서 일찍이 경작 가능성이 검토됐다. 1465년 세조가 영의정 신숙주와 상당부원군 한명회 등 대신들을 대동해 ‘혜화문 밖 다야원 냇가(삼선교 부근 성북천) 한지에 냇물을 끌어다 논을 만드는 작업을 했으나 장마가 지자 모두 모래에 덮여버렸다’는 『세조실록』 기록으로 볼 때 쌀농사를 시도했다가 흙이 사질(沙質)이라 포기했음을 알게 된다. 1921년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지도에도 모두 황지로 표시돼 있다.
개국 초기 조선정부는 삼선평 일대 통행을 금하고 병자들을 구활하는 기관인 활인서(活人署)를 돈암동에 뒀다. 15세기 정릉과 돈암리, 선농단으로 향하는 안암리에 작은 촌락이 형성됐으나 소규모였다. 18세기 영조대에 혜화문 밖 어영청의 북둔(北屯)을 설치하면서 비로소 행정동이 탄생했다. 마을의 첫 이름은 북저동(北渚洞)이었다. 현재의 성북동(城北洞)이다. 복사꽃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맑은 시내의 언덕을 따라 복숭아나무가 도열해 있어 민간에서는 ‘도화동(桃花洞)’이라 불렀다(『한성부』).”
정조 때 문인 이덕무가 ‘성시전도’에 “혜화문 밖은 푸른 숲이 흰 모래밭에 연하였네 북둔의 복사꽃 천하에서 가장 붉네(하략)”라고 읊은 데서도 확인된다(『청장관전서』). 선조 때 문신 윤기도 찾아와 봄날의 풍경을 읊었다. “눈앞에 가득 펼쳐진 복사꽃 푸른 버들이 색을 입히네. 진홍과 연분홍 어울려 꽃안개가 들판에 자욱하네(『무명자집』).” 영조는 성북동에 거주민을 늘리기 위해 이곳에서 만든 천과 메주를 궁에서 구매하도록 하는 유인책을 썼다(『성북동포백훈조계완문절목』). 정조 때 판서 채제공이 1780년 펴낸 성북동 유람기 『유북저동기』가 당시 마을이 있던 곳이 간송미술관 일대임을 전한다. 부근에 있는 선잠단지(先蠶壇址)로 미뤄 주민들이 양잠을 하고 마전(麻田)을 가꿔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북둔이 이 선잠단을 관할했다(『만기요람』).
삼선평 일대에는 흥천사, 개운사 등 서너 개의 사찰이 있었다. 조선이 숭유억불책을 쓰면서 한양의 사찰들이 성종 이후 모두 도성 밖으로 축출된 데 따른 것이었다(『연려실기술』). 영조가 삼선평에 북둔을 설치한 것은 성북천변의 넓은 들판이 군사훈련에 적합했던 까닭이었다. 신라시대에도 화랑들의 훈련장이었다. 안암에는 군마 훈련장도 있었다. “말을 씻기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 정조의 질문에 답하는 대목에서 언급된다(『일성록』 7년 8월 19일). 안암천 일대 경승지에는 왕족과 사대부의 별서들이 여럿 있었던 모양이다. “안암에는 별장의 그윽한 정취와 뛰어난 경관이 있다”고 허목이 『오사구동교별업기』에 기록한 데서 확인된다.
‘삼선평’이라는 지명은 조선 말 순조 때 처음 실록에 등장한다(『순조실록』 16년 3월 21일). 이 일대는 마병도시(馬兵都試) 등 군사들의 활쏘기 훈련장으로 쓰였다. 군 고위급 활쏘기 모임(射會)인 ‘서총대시(瑞蔥臺試)’도 열렸다. 서총대는 창덕궁 후원에 연산군이 쌓은 화려한 대(臺)로서 아래에 연못을, 위에는 정자를 둔 경승이었다. 왕의 연회 장소와 무술시험장으로 사용됐는데, 순조대에 와서 이름만 빌려 삼선평에서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 고종의 치세 31년 동안 ‘서총대시’가 빈번하게 열렸다. 관우를 기리는 명륜동의 문묘나 북관왕묘에 전배한 후 치르기도 했다(『고종실록』 30년 5월 13일, 9월 13일 등).
흥선대원군이 군부 통합기관으로 세웠으나 고종이 폐지해 버린 삼군부(三軍府)의 청사 건물 총무당도 1930년대 광화문 옆에서 삼선동으로 옮겨졌다. 삼선평은 20세기 들어서는 군사활동 대신 스포츠 활동 공간으로 바뀌었다. 1906년 3월 조선 최초의 축구 경기가 열린 게 시초였다. 궁 내부 예식원 외교문서 번역관 현양운 등 30명이 조직한 대한축구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YMCA)의 경기였다(『한국축구백년사』). 1925년 그 일대에 경성운동장이 건립됐다. 2007년 낡아서 철거된 동대문운동장의 전신이다.
1920년대부터 경성 인구가 급증하면서 1930년대는 주택난을 겪었다. 조선총독부가 이 삼선평 일대를 경성에 편입시켜 주택난 문제를 해소할 돌파구를 찾으면서 큰 변화를 맞는다. 1936년 경성 최초의 구획정리사업이 전개되면서 영등포와 더불어 신시가지로 조성됐다. 전차가 혜화동에서 돈암동까지 연결되고 돈암동, 보문동, 안암동에 주택이 들어섰다. 경기도 고양군 돈암리였던 지명은 경성부 돈암정(敦岩町)으로 바뀌었다.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물자가 부족해지자 조선인 주택개발업자에게 땅을 매각했다. 그 결과 소규모 한옥들이 단지를 이뤘다. 1959년 항공 촬영한 삼선평 사진은 안암천 주변 평야에 한옥이 빼곡하게 들어앉은 모습을 담았다. ‘돈암지구 단지’가 완공된 1941년에는 한 단지 안에 40~60호씩 거주했고, 입주자는 대부분 30대 전후의 교원, 회사원, 음악가, 화가 등 전문직 종사자였다(『서울잡기』, 팔보). ‘안감내’라고 부르던 안암천에서는 부녀자들이 빨래를 했고, 교회와 목욕탕이 하나씩 들어섰다(『그 남자네 집』, 박완서). 돈암지구는 6·25전쟁 기간 피란민이 유입되면서 규모가 커졌다. 한성대, 성신여대 등 대학의 등장도 인구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돈암동』, 서울역사박물관).
지난달 구보는 삼선교에서 안암동까지 2만3000보를 걸었지만 1970년대 하숙 당시의 한옥 골목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개성 없는 아파트와 다가구·다세대 주택만 즐비했다. 1986년과 2003년 개정된 건축법과 재개발법 때문이다. 구보는 미국인 피터 바톨로뮤(1945~2021) 씨가 재개발될 뻔했던 이곳 한옥들을 매입해 보존해 왔다는 사실에 눈길을 준다. 그의 집이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주인은 단절하려 한 오래된 맥락을 객이 지켜낸 것이다. 주객전도로 남은 고색창연한 한옥에서 갈증을 달래고선 기억 속 삼선평을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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