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현대 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같은 언어·문화…국가로 묶는 접착제 ‘시민종교’로

입력 2024. 11. 20   16:36
업데이트 2024. 11. 2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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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22. 19세기 민족주의(상)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주창하다

나폴레옹 프랑스군 유럽 대륙 휘젓자
들뜬 분위기 주민들 국가와 국민을 동일시
외세와 전쟁 경험 남과 나로 구분지으며
국민의식으로 발전

인종집단, 정치 단위로 인쇄술 결정적 역할
문법 표준화로 공식어 채택 유도 
동질화 이뤄내

 

 

1871년 1월 베르사유 궁전에서 거행된 독일제국 선포식 장면. 위키백과
1871년 1월 베르사유 궁전에서 거행된 독일제국 선포식 장면. 위키백과



올해 8월 우리는 파리 올림픽에서 선전한 우리 선수단의 일거수일투족에 함께 웃고 울었다. 그런데 메달을 획득해 시상대에 오른 선수는 물론 대회에 참가한 모든 선수 유니폼에는 거의 예외 없이 자국 ‘국기(國旗)’가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작은 천 조각에 울고 환호하며 심지어 어떤 이는 소중한 목숨까지 던질까? 인류 역사 속에서 언제부터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까?


19세기 후반 유럽서 봇물 터지듯 시작 

오늘날 우리 한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숙원은 최근 북한 김정은 정권이 아무리 지워버리려고 발버둥 쳐도 남북통일일 것이다. 단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열강에 의해 양분되고, 이후 6·25전쟁으로 더욱 높아진 분단 장벽을 허무는 과업 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가 되고자 할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남북한은 같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흔히 민족주의(Nationalism·民族主義)로 알려진 혈통이나 언어 등을 공유하는 ‘동질적 문화집단 의식’은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봇물 터지듯 나오기 시작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래 나폴레옹 군대의 진군과 더불어 유럽 각지로 혁명의 신조인 자유, 평등, 그리고 우애 이념이 확산되면서 19세기 전반기에는 자유주의(Liberalism)가, 후반기에는 민족주의가 풍미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파죽지세로 유럽대륙을 휘저어 놓자 프랑스 주변에 살던 주민들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들뜬 분위기에 휩싸였다.

다른 무엇보다 외세에 대항해 치른 전쟁 경험이 타자(他者)와 나를 구분하는 민족의식 형성과 성장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근대국가 성립 이후 민족이라는 개념이 인류 역사에 등장하면서 격화한 민족 간 충돌은 인류에게 수많은 갈등과 오해, 그리고 아픔을 가져다줬다. 심지어 자(自)민족 명령이라는 미명하에 다른 민족을 대량학살하는 비극적인 만행조차 19세기 이래 수없이 자행됐다. 민족주의 영향으로 외세 지배나 간섭으로 분열돼 있던 지역민의 민족의식이 형성 및 고양된 것이 빌미를 제공했다. 통일된 국가를 수립하려는 거센 열망이 급기야는 무력 충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민족주의 물결은 19세기 전반기에도 출렁이고 있었다. 이때는 주로 타민족의 강압적 지배에 놓여 있던 주민들의 해방과 독립국가 수립을 추구하는 이념으로 자유주의와 함께 영향을 미쳤다. 민족주의의 진정한 전성기는 19세기 후반기였다. 이 시기 유럽 각지에서 민족주의가 독립국가 수립의 핵심 이데올로기로 부각됐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분열된 채 역사적 상황 전개에 따라 상호 반목 및 충돌을 일삼아 온 사람들이 같은 민족이란 이름으로 국민의식을 형성하고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데 민족주의가 실천 이념으로 작동했다. 대표적 사례로 여전히 다수 군소(群小)국가로 분열돼 있던 이탈리아 통일(1866)이나 특히 같은 게르만 민족이면서 긴 세월 무려 수백 개의 영방국가(領邦國家)로 나뉘어 있던 독일 통일(1870)을 꼽을 수 있다.

19세기 후반을 풍미한 것도 모자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인의 독립의식을 고취했음은 물론 속칭 ‘세계화 시대’인 오늘날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민족주의는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일까? 왜 그 이념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심장이 뜨겁게 달아오를까? 민족주의는 비교적 근대에 형성된 민족(nation)이라는 개념에 근거한다. 민족은 공통된 언어와 관습, 문화 및 역사로 결속돼 같은 국가기구 지배를 받는 사람들로 이뤄진다. 따라서 통상 민족주의자들은 행정 권력이 관리하는 영토가 인종집단의 경계와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19세기 이전에는 유럽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정치적 단위가 이처럼 인종집단으로 정의된 경우도, 더군다나 인종집단이 국가를 지배한 사례도 없었다. 당연히 군주나 왕조가 각국 정치 단위를 구성하는 기본 구조였다. 그런데 1789년 발발한 프랑스혁명이 기존 정치 지형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기폭제가 됐다.

이제 지역마다 자신 (인종)집단의 상징을 만들어 공동체 주민에게 확산시킴으로써 이른바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했다. 이에 따라 국기와 애국가를 고안해 제작하고, 과거 역사를 민족사로 정리해 국경일을 선정했다. 이어 민족 영웅을 발굴해 영광의 스토리를 만들고, 동상과 기념비를 건립해 적극 선양했다. 또한 사전류 및 문법 교과서 등을 발간해 문자를 통일하고 이어 민족사를 정리해 의무 교육제도를 통해 널리 전파했다. 물적으로는 국립박물관, 지역박물관을 건립해 민족영웅 현양(顯揚), 역사유산 수집 및 전시를 활성화했다.


제국의 충성 기반 왕조적·종교적 정서 갉아먹어 

실제로 민족주의는 19세기 이미 제국에 대한 충성의 기반이던 왕조적·종교적 정서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던 발칸 지역에서 연이어 봉기해 그리스, 세르비아, 그리고 불가리아가 신생독립국이 됐다. 특히 1848년 유럽 각지에서 발생한 혁명은 중부 유럽에서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헝가리인이 거세게 표출한 민족주의의 잠재력을 과시했다. 1850년대 합스부르크 왕조가 추구한 왕권 강화책의 실패는 역사의 시계추가 더 이상 18세기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이제 ‘민족(民族)’은 국가의 새로운 시민종교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민족국가를 시민 각자에게 직접 접촉시키는 방식으로 동시에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닌 다른 조직-국가와 동일하지 않은 종교, 인종집단 등-에 충성하는 자의 비중을 낮추는 방식으로 모든 시민을 국가에 묶어주는 일종의 ‘접착제’였다.


인적·물적 소통 활발한 도시 생활양식으로 가능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동질화(同質化)가 가능했을까? 혈연적 종족을 넘는 민족주의를 가능케 한 외적 조건으로 문해력 향상과 교통통신망의 발달, 그리고 도시 생활양식을 꼽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인적 및 물적(정보 유통) 소통이 활발해졌기에 ‘우리는 하나’라는 동류의식이 형성될 수 있었다. 특히 인쇄 분야의 발전은 새로운 국가 개념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시민을 확장된 사회적 가족으로 묶는 공용어가 없었다면 국민국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 이러한 상황에서 인쇄업자들은 가장 지배적인 단일 토착어로 문법을 표준화해 그것을 초창기 국민국가 공식어로 채택하도록 유도했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 직전에는 우리가 현재 프랑스라고 부르는 지역 인구 중 50% 미만이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됐을 때 반도 전체 인구의 2.5% 정도만이 표준 이탈리아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통일 주도 세력은 “우리가 이탈리아를 만들었다. 이제 이탈리아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다.

19세기 역사 전면에 등장해 심지어 세계화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민족주의는 역사적으로도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엄밀한 의미에서 민족주의는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처럼 완결된 이데올로기가 아니기에 역사적으로 다른 이즘과 쉽게 결합해 큰 폐해를 끼치기도 했다. 민족주의는 군국주의와 결합해 1930년대 유럽을 광기와 파괴로 몰아넣은 파시즘으로, 사회주의와 결합해 스탈린식 억압적인 공산주의로 발현돼 엄청난 인명 살상과 인권 유린을 초래했다. 심지어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민족 우선의 감성이 개인 자유 및 감수성을 억압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기에 우리는 항상 조심하고 예의주시해야만 한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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