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그때 그 곳 - 난지도, 갈대·난초·쓰레기 그리고 공원
난초·영지가 지천이라는 예쁜 이름
60년대 수색서 나룻배 이용하기도
조선시대엔 오리섬 ‘압도’라 불리며
82만 평 무성한 갈대밭 나라가 관리
1978년 서울시가 쓰레기 매립 시작
80년대 고철 줍던 주민·아이들도…
쓰레기 더미에 흙 덮어 공원 재탄생
비단 같은 한강 흐르던 날 아스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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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도(蘭芝島)는 난초와 영지가 지천이던 곳이어서 그 이름을 얻었다. 북한산 문수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사천(沙川)을 이루며 한강으로 유입되는 곳에 모래가 퇴적돼 형성된 섬이었다. 사천은 ‘모래내’라는 지명으로 남았다. 경기도 고양시에 속했다가 1949년 서울시로 편입됐다. 지금은 상암동에 붙은 모습이지만 옛 지도를 보면 한강과 샛강으로 둘러싸인 섬이었다. 1967년 구보는 버스를 잘못 탔다가 수색 종점에서 승객들이 나룻배로 옮겨 타고 샛강을 건너 난지도로 들어가던 모습을 인상 깊게 바라본 기억이 있다. 조선 초기 지도인 ‘경조오부도’에는 ‘중초(中草)’라고 표기돼 있는 것으로 미뤄 풀과 꽃이 무성한 들판이었을 것으로 구보는 짐작한다. ‘오리가 물에 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압도(鴨島)’로도 불렀다. 옛사람들은 홍제천과 불광천이 합류하면서 하천 폭이 넓어진 채 한강과 만나는 압도 앞 한강을 ‘비단 자락 같은 호수’라는 뜻의 ‘금호(錦湖)’로 불렀다. 일직선인 지금과 달리 옛 한강은 하천과 모래섬, 산들이 곡선을 이뤄 ‘동호’ ‘서호’ ‘행호’ 등 호수로 지칭한 곳이 많았다.
금호 풍경을 유난히 좋아했던 조선 전기 문신 남효온이 압도로 향하다가 비가 개자 그 평화로운 풍광을 시어로 묘사했다. “넓고 푸른 강물에 가랑비 걷히니 강속 섬은 물결 베고 누웠구나”-『추강집』.
성종 때 사가독서(賜暇讀書)로 뽑힌 신용개도 용산 독서당에서 공부하며 양화진을 거쳐 금호까지 뱃놀이를 즐겼다. “가을 강의 물결 거세기도 한데/ 유객은 이 저녁에 배를 젓는구나/ 압도의 파도는 은빛 물결 일으키고 (하략)”- 『이요정집』 ‘독서당록’.
구보는 가을 저녁 금호에 비친 달빛이 은색으로 빛나는 광경을 관조하는 시인의 마음을 짐작한다. 압도의 고절한 푸르름은 조선 후기 문신 이민구의 마음도 뺏었다. “홀로 푸른 풀 펼쳐진 모래톱은/ 의연히 저 멀리 떠 있구나” - 『동주집』 ‘압도의 풀밭’. 1741년 겸재 정선이 압도를 그려 『경교명승첩』에 남긴 ‘금성평사’에는 민가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어 농사짓는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난초가 섬을 덮기 전 82만여 평의 압도에는 갈대가 무성했다. “매년 군인을 뽑아 한 달 정도의 부역으로 압도의 억새풀을 베어 필요한 대소사에 사용했다”는 기사가 『광해군일기』 2년 6월 15일 자에 보인다. 압도의 갈대는 한강변 빙고(氷庫)에 태양열을 차단하는 덮개에서부터 지붕이나 삿자리, 종이, 공예품, 주렴 등의 재료로 쓰는 등 용도가 많아 국가가 관리했다. 평소 참봉직인 선공감을 둬 갈대를 관리토록 하다가 늦가을 벨 시기가 되면 감예관을 파견해 작업을 지휘하도록 했다. 인조 때 문인 최립이 지은 시문집에 당시 풍경이 묘사돼 있다. 감예관 조위한이 압도 벌초에 나선 후 보내온 자조적인 시에 차운해 화답한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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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거진 갈대숲 쓸쓸도 한데 매서워라 바람과 서리 마음이 급해지네 질퍽한 개펄로 군사들 몰아넣어 물고기 꿰듯 줄 세워 나아가니 낫은 초승달처럼 섬광을 발하는구나(후략)” - 『간이집』 ‘환조록’. 감예관은 자기 일에 전혀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있다. 바람 차고 서리 내린 추운 계절에 개펄을 드나들며 갈대를 베는 작업의 고달픔이 행간에서 묻어난다.
압도 갈대밭은 금령(禁令)이 내려져 왕명 없이는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태종 때 이곳 갈대를 남벌하도록 방치한 죄로 경기도 관찰사가 탄핵된 바 있다(『태종실록』 6년 8월 7일). 광해군 때는 이이첨 무리가 불법적으로 섬을 분할하고 갈대를 베었다가 인조반정 후 도마에 올랐다(『인조실록』 1년 7월 11일). 조선은 별궁들의 운영을 보하기 위해 전답을 내리는 제도를 시행했다. 난지도 초평은 김포 초평과 더불어 창의궁(彰義宮)에 속했다(『일성록』 정조 19년 10월 14일).
창의궁은 영조의 잠저였고, 생모 숙빈 최씨가 말년을 보낸 별궁이었다. 선왕의 공간이었던지라 정조는 난지도에 신경을 많이 쓴 사실이 기록에 보인다. ‘갈대 수확이 갈수록 줄어들어 주문량을 맞출 수 없다’는 난지도 공인(貢人·일꾼) 상소에 부응한 것을 비롯해 수재와 화재를 당할 때마다 곡물을 보조했다(『정조실록』 3년 3월 10일, 5년 2월 19일 등). 이러한 배려는 정조의 아들 순조 대에까지 계승됐다(『순조실록』 25년 1월 14일 등). 언제부터 압도가 난지도로 개명됐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구보는 『정조실록』에서부터 섬을 ‘난지도’로 기록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갈대 수확이 줄어들면서 주민들은 밭작물을 경작하기 시작한 듯하다.
1960년대 촬영한 난지도 사진에도 수수밭 가을걷이 풍경이 담긴 것으로 미뤄 줄곧 수수를 재배해 왔음을 유추케 한다. 수수 알갱이는 곡물로, 수숫대는 빗자루 재료로 쓰였다. 갈대가 떠나간 자리에 난초와 영지가 들어섰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아름다운 섬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를 맞는다. 1978년 서울시가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하면서였다. 구의동·장안동·상계동·방배동·압구정동 등의 수거장 기능을 이곳에 모았다. 1993년 폐쇄될 때까지 난지도에는 주민 400여 명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삶은 쓰레기와의 공존이었다. 1980년대 이곳을 취재한 구보에게는 고철을 건져 매각하며 사는 주민들의 고된 삶과 아이들의 얼굴에 새카맣게 들러붙어 있던 파리떼가 기억에 남아 있다.
15년 동안 산업폐기물과 건설 폐자재, 생활쓰레기 등 9000만여 톤이 쌓여 산을 이루자, 1993년 서울시는 이 쓰레기 더미 위에 1m 두께로 흙을 덮었다. 노을공원이 그렇게 탄생했다. 쓰레기 매립장은 경기도 김포시 검단으로 옮겨졌다.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발생하면서 덤프트럭 2700대 분량의 잔해물이 생기자 난지도는 다시 한번 쓰레기를 받아들였다. 98m 높이의 하늘공원이 이 잔해물 위에 조성됐다. 구보는 복자기, 노각나무, 모감주나무 등이 산허리를 덮고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하늘공원에서 ‘월드컵공원’을 내려다보며 공간을 변모시키는 시간의 힘을 실감하면서도, 키 큰 갈대가 들판을 가득 채우고, 샛강에서는 재첩이 자라고, 한강변 갈대밭에는 웅어가 산란하던 시절의 난지도를 아스라이 그려보는 마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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