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예술
Artist Studio ⑭ 김병호 - 완전히 아름답고 철저히 인공적인
공장에서 찍어낸 부품 반복 결합
제각각 모양 다양한 자연과 달리
설계대로 만들어진 인공의 미학
반사된 조명에 일렁이는 빛 매력
김병호 작가는 몇 년 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의 해발 2000m 산속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관찰과 사색을 즐기는 작가는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작업실에서 ‘풀멍’을 즐긴다고 한다. 1주일에 절반가량 작업실에서 드로잉하거나 부품을 조립하며 작품을 구상하고 세상을 관찰한다. 작업실 한쪽에 자리한 커다란 책상 위에는 여러 공장에서 만들어온 부품과 그 조합으로 구성된 다양한 모듈, 미니어처 샘플이 질서 정연하게 펼쳐져 있었다. 김 작가의 작업실은 그의 작업 과정과 예측 결과물을 동시에 살필 수 있는 쇼룸과 같았다.
완벽하게 마감된 표면의 유려하고 반짝이는 질감, 질서정연하며 경이롭고 아름다운 금속 조형물은 조각과 설치 작업을 선보이는 김병호 작품의 대표적 이미지다. 판화와 공학을 공부한 김병호 작가에게 조각의 전통적인 조형 어법과 방법론은 적합하지 않았다. 대신 작가는 여러 엔지니어, 전문가와 협업 방식을 택해 현대사회의 제작 공정을 바탕으로 전략적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따라서 작가에게 작품은 규범, 규칙과 체계 등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제작되는 제품과 유사한 것이다. 지금부터 다양한 모듈의 결합으로 이뤄진 김병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를 따라가며,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과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바를 하나씩 조립해 가고자 한다.
#분업화 #산업화 #대량 생산시스템
김병호는 산업화, 분업화된 현대사회 시스템을 활용해 작업한다. 그의 작업은 드로잉을 바탕으로 설계도면을 그리며 시작된다. 이후 대량생산 공정을 통해 모듈을 제작하고 조립한 후 설치한다. 작가는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엔지니어, 건축가, 구조설계사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하며 분절화된 과정들을 연결한다. 표준화된 각종 제품(부품)을 활용하고, 김병호표 부품을 설계, 생산하는 등 생산 인프라를 적극 활용한다. 그렇게 생산된 부품을 견고하게 연결해 모듈을 만들고, 작가의 규칙에 따라 배열하고 조립해 건축물, 입체 작품, 조각품을 완성해 낸다. 모듈화된 시스템과 과정이 투영된 작품에서 관람객은 우리의 삶과 물질문명 과정을 발견하게 된다.
#설계도면 #매뉴얼
김병호의 분업화된 협업 과정에서 빛을 발하는 존재는 설계도면이다. 그의 설계도는 모든 과정의 참여자와 소통할 수 있는 만국공통어로 역할한다.
그러므로 설계 스케치, 전체 구조도와 세부 도면, 설치 방식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모든 요소와 과정을 포함해 정교하고 치밀하게 제작된다. 그가 설계한 부품들은 이 제작도면에 따라 공장에서 엔지니어들에 의해 가공, 생산된다.
이 부품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 매뉴얼에 따라 조립, 설치된다. 설계도면은 또한 중국 등 해외에서 전시할 때 제작 비용을 절감하고, 동일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가이드 역할을 한다. 따라서 김병호에게 설계도면은 작업의 출발점이자 종착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직선(수직과 수평) #평면 #구 #인공의 형태
김병호는 조형적인 단순함을 추구한다. 직선, 평면, 기하학적인 형태는 인공적 형태다. 그는 이러한 조형적 요소를 문명으로 상정한다. 언뜻 비슷해 보여도 모두 제각각 형태를 지닌 자연과 달리 동일한 형태와 규격으로 구성된 현대문명을 대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하나의 직선은 모여 그룹을 이루고, 그룹은 특정한 성격과 방향성을 지니고 뻗어가며 때로 곡선을 만들고 화합한다. 이는 마치 군대 행렬처럼 가지런하고 훈련된 형태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우리와 닮아 있다. 또 하나의 조형 요소는 구이다. 작가는 구를 직선과 평면의 계획적이고 인공적 환경에서 불거져 나온 혹 또는 욕망이라고 설명한다. 문명이 진화하면서 파생되는 혹, 불편한 동시에 현혹적인 존재다. 수평정원 시리즈에서 문명의 혹은 표면에 빛과 서로를 반영, 반사해 마치 샹들리에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덩어리로 표현됐다. 우리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그룹 내 가치와 위상을 학습하며 획일화된 삶과 사고방식을 따른다. 여기에 의심하는 자아가 곧 혹의 존재다. 작가는 사회와 충돌하는 자아를 부정적 존재가 아니라 아름답고 매혹적인 요소로 표현하고 있다.
#모듈 #조립
김병호의 작품은 단순한 형태로 결합한 모듈과 그 모듈이 만들어내는 변주로 구성된다. 작가는 이와 같은 제작 방식을 기성품화(化) 과정을 거친다고 표현한다. 즉 작품을 ‘제품’을 만드는 과정으로 접근하는데, 각 부품을 연결해 하나로 결합된 완성품을 만드는 것은 부분들이 서로 제대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렇듯 분업화, 획일화된 물질 세계 구조가 작품에 기능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조립된 완성품은 제품에서 작품으로 변이해 그 원래의 기능, 즉 예술의 기능을 생각하게 한다. 설계도에 따라 공장에서 위탁 제작된 부품들이 여러 조력자의 협조로 조립돼 완성품이 돼 모든 것을 설계한 작가 앞에 예술품으로 현현함으로써 말이다.
#공공조각 #화이트 큐브를 벗어나
김병호의 작품 중 다수는 전시장 밖, 송광사, IFC몰 앞, 스페이스K 미술관 앞 공원 등 다양한 공간에 설치돼 있다. 작가는 본인의 작품이 화이트 큐브 속 오브제로만 보여지길 거부하고, 실내 전시 제한성을 넘어 다양한 사람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작가는 작품이 설치된 지역 공동체와 공간을 반영해 사람들의 기억을 매개하는 역할을 작품에 담았다. 관람객에게 굳이 현대미술 작품으로 다가갈 필요 없이, 종교적인 공간에서 소망을 빌기 위한 매개가 되고, 또는 도시 속 현대인의 기억을 매개하고 미감을 충족시키면 그걸로 충분하다.
#반짝이고 내구성이 강한 철
외부에 작품을 설치하는 작가는 다양한 환경적, 기상적 요인을 고려해 내구성이 강하고 안정적인 재료인 철(스틸)을 주로 사용한다. 예리하게 가공 가능하되 합리적인 대량 시스템에도 적합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떤 보석보다 반짝이는 속성이 매력적이다. 빛을 반사하고, 바라보는 대상을 반영하며 반짝이는 일렁임으로 관람객을 유혹하는 동시에 완벽한 마감의 완성도를 표현할 수 있는 스틸은 완성도와 미감을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에게 적합한 재료다.
오는 12월 김병호 작가는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내년 3월 홍콩과 중국 선전에서 두 개의 개인전이 예정돼 있다. 그간 K11 아트스페이스 등 중국에서 전시를 선보이며 좋은 평가를 받아온 터라 올 연말부터 내년까지 이어질 김병호 작가의 활약이 기대된다.
김병호는
홍익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2002년부터 3년간 과학기술부 국가지정연구실 연구원 자격으로 예술공학(art engineering)을 공부했다. WWNN(2024), K11 미술관(선양·2022), 아라리오갤러리(상하이·2018), 소마미술관(2010), 프랑크푸르트 문화부 스튜디오(2009) 등에서 1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매개기억 프로젝트’(송광사·2016) ‘징안국제조각프로젝트’(상하이·2012)를 비롯해 100여 회의 국내외 단체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서울대학교 미술관, 정부종합청사, 현대자동차, 독일 프랑크푸르트시 문화부, 중국 상하이 반룡천지, 홍콩 뉴월드 디벨롭먼트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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