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현대 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노동자 세상 꿈꿨지만 독재·인권 유린으로 마침표

입력 2024. 11. 06   16:19
업데이트 2024. 11. 0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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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21. 19세기 사회주의(하)
-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꾸다

자본주의와 맬서스의 ‘인구론’으론
빈곤 해결할 수 없다고 본 마르크스
‘자본론’ 통해 과학적 공산주의 설파
국가 소멸 대신 국가로 귀속된 재산 
권력가들 소유로 넘어가며 폭압 낳아
‘원조’ 소련 한 세기도 못 버티고 소멸
인간 소유욕 무시하고 도덕군자 강요 
물질적 존재의 정신적 측면 설명 못 해

 

기념비에서 잘려 나간 레닌 두상. 출처=위키백과
기념비에서 잘려 나간 레닌 두상. 출처=위키백과

 


사회주의의 지속적인 발전은 사실상 카를 마르크스(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라는 두 인물이 없었다면 그 생명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누구이며, 그와 엥겔스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마르크스는 1818년 독일 서남부 프랑스 국경에 인접한 고대도시 트리어의 유대계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라인신문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으나 프로이센 국왕의 독실한 신앙심을 조롱하는 등 과격한 기사 작성으로 정부로부터 탄압받았다. 1843년 프로이센 정부 관리의 딸과 결혼했으나, 그해에 파리로 망명해 1848년까지 살았다. 이곳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1849년 최종 정착지 영국으로 이주한 마르크스 가족은 당시 런던 변두리인 소호 딘스트리트 28번지에 삶의 둥지를 틀었다.

가족까지 거느린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을까? 아무리 비범한 지혜를 지녔어도 그 역시 ‘생활인’이었기에 뭔가 ‘밥벌이’를 해야만 했다. 1850년대에 그는 뉴욕 트리뷴의 런던통신원으로 일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이때 금전적으로 그를 도와준 인물이 바로 1844년 8월경 프랑스 파리에서 만나 평생 친구이자 동지로 활동한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독일 브레멘 출신 면방직업자의 아들로, 영국 맨체스터에서 부친의 공장을 운영하면서 마르크스를 경제적으로 후원해 줬다. 엥겔스는 1845년 『영국 노동자 계급의 조건』이라는 책을 출판해 마르크스보다 먼저 노동계급의 어려운 상황을 폭로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일하지 않는 자본가 왜 점점 부자가 될까 


마르크스가 일생을 통해 밝히고자 한 것은 노동자는 항상 가난에 쪼들리는 반면 자본가는 일을 하지 않는데도 왜 점점 부자가 될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를 작동시키고 있는 자본주의는 과연 이상적인 이론인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당시 유행한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에 의하면 빈곤의 원인은 사회관계가 아니라 자연의 숙명적 원리인 인구법칙에 있었다. 즉 실업·빈곤·범죄가 발생하는 것은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 인구와 삶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 격차는 세월이 갈수록 커지기에 빈곤 문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러한 자본주의 테제를 반박할 요량으로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부터 유용하다고 판단한 사상들을 천착했다. 그의 지적 기반 형성에 영향을 준 선구 사상으로 헤겔의 관념론 철학,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철학, 그리고 맬서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등이 설파한 영국의 고전경제학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앞선 사상과 이론의 세례 속에서 마르크스는 힘든 생활고에도 『자본론』을 저술해 자신의 지적 체계를 정립하고 설파했다. 하지만 그의 소망과 예측과는 달리 실제로 망한 것은 그가 그토록 실현 가능한 ‘과학적’ 이론이라고 역설한 공산주의였다. 주지하다시피 1991년 12월 원조(元祖) 공산국가인 소련이 불과 한 세기도 버티지 못한 채 소멸했다. 역사의 저울 위로 올라간 공산주의는 결국 함량 미달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공산주의가 인류 역사에 끼친 보다 심각한 문제는 독재와 인권 유린이었다. 왜 현대사에서 현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는 인민을 위한다는 현란한 수사학적 선동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모두 하나같이 국가 특권층과 이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인물의 개인 독재로 귀결됐을까? 우리가 잘 알듯이,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오늘날 김정은 독재 아래 북한이 잘 보여주듯이 옛소련 이후 모든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는 결국 특권층의 지배로 귀결됐다. 스스로는 공유의 사회적 소유체제를 실현할 수 있다고 확신했을지 모르나 이는 말 그대로 믿음에 지나지 않았다. 일찍이 프랑스의 정치사회학자 레이몽 아롱이 설파한 바대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구호는 실현 불가능한 ‘구름 위’ 유토피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989년 붕괴 직전 브란덴부르크문 앞 장벽 위에 선 베를린 시민들. 출처=위키백과
1989년 붕괴 직전 브란덴부르크문 앞 장벽 위에 선 베를린 시민들. 출처=위키백과



멸망 예견한 자본주의가 살아남은 이유 

마르크스주의는 국가 소멸을 주장했지만 결국 없어진 것은 국가가 아니라 사회였다. 그래서 사회적 소유가 아니라 국가 소유가 됐다. 이때 국가 소유란 국가권력의 소유이고, 현실적으로는 국가 권력을 장악한 정치권력자의 소유였다. 이는 공산주의 통치 당시 러시아의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이며, 최종적으로는 스탈린 대원수, 김일성 수령과 같은 전제군주나 진배없는 ‘폭압적인’ 절대 권력자였다. 더구나 이러한 독재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역경을 이기긴 쉬워도 풍요를 이기긴 너무나 어렵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라는 19세기 영국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의 경구(警句)를 넘어서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필연적으로 멸망하리라 예견한 자본주의는 살아남고 오히려 공산주의가 몰락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19세기 말 이후 자본주의는 나름 진화를 통해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높여 이들도 기초적인 부의 축적과 소비를 가능하게 만드는 유연성을 발휘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르크스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공산주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했으나 현실은 반대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성향이 강하지 공익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힘껏 쏟지 않으며, 필요에 따라 소비하고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공짜라면 ‘선(先) 확보, 후(後) 처리’라는 우스갯소리처럼 일단 욕심을 부려 필요 이상으로 가져가고 축적하려 시도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의 공통된 본능인 ‘소유욕’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경제체제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모두가 도덕군자처럼 행동하거나 국가가 나서서 그렇게 하도록 강제해야만 했다. 실제로 소련에서는 공산당이 나서서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강제로 노동을 동원하고 여기에 배급제까지 실시했으나 철저하게 실패했다.


인간은 왜 이타적이어야 하는지 증명 못해 

정신적 측면에서도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의 한계는 분명했다. 마르크스가 주창한 유물론의 가장 큰 맹점은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과연 왜 목숨을 걸고 이타적인 혁명 투쟁에 나서야 하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영혼이 없는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과연 어떻게 혁명적 사명감을 고취할 수 있을까? 이들의 주장처럼 불멸의 영혼도 초월적 존재도 현생(現生) 이상의 그 어떤 세계도 없는 경우 인간은 왜 무엇을 위해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할까? 이처럼 마르크시즘의 최대 모순이자 맹점은 바로 인간을 물질적 존재로 규정한 채 그러한 인간에게 물질적 본성에 반(反)하는 혁명적 자기희생을 요구한다는 데 있었다.

한편 현실사회주의는 몰락했으나 그렇다고 이념으로서 사회주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역사 속에서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이론과 조직을 갱신해 왔고, 현재도 운동하면서 ‘몰인정한’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 역할을 수행한다. 이미 19세기 후반 독일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 한계를 자각하고 일명 ‘수정 사회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는 자체 모순과 혁명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마르크스 예언을 거부하면서, 노동자 계급은 폭력혁명을 포기하고 자신의 정치·경제적 권리 확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처음엔 진영 내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으나 점차 설득력을 발휘해 1959년 독일 사회민주당은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당(黨)의 공식 노선으로 채택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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