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스테이지 - 연극 ‘나와 할아버지’
작가 지망생이 할아버지 과거 찾아 떠나는 여정
화려한 무대 장치·극적 효과 없는 무대
명품 연기·탄탄한 스토리만으로 가득 채워
양경원·정선아 ‘소통 없는’ 티키타카
관객 번쩍 들어 웃음의 바다로 던지고
일상의 평범함에서 비범함 길어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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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해진 공기의 기온이 투수가 던진 체인지업 볼처럼 눈앞에서 뚝 떨어져 버렸다. 몸만큼이나 마음 한구석이 휑하니 스산하다면, 이 연극 한 편을 처방해 드린다. 연극 ‘나와 할아버지’는 밤거리의 어묵 국물처럼 뱃속 깊은 곳까지 따뜻하게 데워주는 작품이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극단 ‘간다’(풀네임은 공연배달서비스간다)는 2004년, 젊은 감각과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작품을 잇달아 선보이며 대학로 연극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뜨거운 여름’ ‘템플’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등 매번 새로운 시도로 관객을 놀라게 한 간다가 오랜만에 ‘나와 할아버지’로 돌아왔다. 오래된 벗처럼 편안하고, 낡은 일기장처럼 소중한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내놓는다.
‘나와 할아버지’는 드라마 작가 지망생 준희가 할아버지의 과거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린, 평양냉면처럼 슴슴한 맛의 작품이다. 할아버지의 옛사랑 이야기를 듣고 멜로드라마를 쓰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마치 햇병아리 작가가 베스트셀러 작가의 비법을 훔쳐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처럼 순진하게 들린다. 하지만 준희는 춘천 가는 길에서 예상치 못한 풍경과 마주한다. 마치 숨겨진 보물찾기처럼, 할아버지의 삶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맨얼굴을 드러낸다.
무대는 단출하다. 덩그러니 놓인 목제가구 하나가 전부다. 미니멀리즘의 이름을 빌린 비용절감 차원의 아이디어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가구는 마법처럼 변신을 거듭한다. 여행길의 버스가 되고, 병원 침대가 되며, 때로는 정겨운 식탁으로 변한다. 변신의 절반은 관객이 상상력으로 채워야 하지만, 이런 것이 또 연극 보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어어…” 하는 사이 관객은 등장인물들과 함께 춘천행 버스에 오른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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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명품 연기 역시 간다답다. ‘준희’ 역의 차용학은 꽤 오래 보아 온 배우다. ‘나와 할아버지’는 물론 ‘우리 노래방 가서 얘기 좀 할까’ ‘뜨거운 여름’ ‘올모스트 메인’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등 간다의 작품에 자주 출연했다. 선이 굵은 남성적인 외모에 독특한 대사 톤을 가져 무대에서 눈에 확 띄는 배우다.
‘할아버지’ 역은 김승욱, 오용, 양경원이 맡았는데 이 중에서 양경원으로 보았다. 양경원이란 배우는 글로벌 히트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윤세리(손예진 분)와 티키타카를 벌이는 북한군 5중대 특무상사 표치수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실 양경원은 까도 까도 속살이 나오는 양파 같은 배우다. 그는 이번 작품의 게스트 배우로 출연한 탤런트가 아니라, 간다의 공식단원으로 이미 간다 작품에 다수 출연했다. 놀라운 것은 그의 데뷔작은 연극이 아니라 뮤지컬, 그것도 탭댄스가 필수인 ‘브로드웨이 42번가’였다는 사실이다. 뮤지컬 배우로 설 때는 연기보다 춤 실력이 더 돋보였다는 동료배우들의 ‘증언’도 있다.
‘할머니’ 역의 정선아는 이 배역에 정평 나 있는 배우. TV, 영화에도 종종 얼굴을 비쳐 대중에게 친숙한 얼굴이다. 여배우로서는 드문 독자적인 코믹 연기 스타일을 보여주는 정선아는 이번 시즌에서도 어김없이 관객들을 번쩍 들어 웃음의 바다로 던져버린다. 특히 할아버지와 큰소리를 주고받으며 말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압권이다. 서로 한마디도 지지 않고 퍼부어대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상대 말에 반론한다기보다 일방적으로 본인들 할 말만 쏟아내고 있다. 이 두 노부부의 일상을 단 한 장면에 축약해 넣은 느낌이다.
이 작품은 극단 간다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간다 입문작’으로도 추천하고 싶다. 화려한 무대 장치나 극적인 효과 없이 배우들의 연기와 탄탄한 스토리만으로 관객 마음을 움직인다. 담담한 문체로 깊은 슬픔과 애환을 그렸던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을 읽는 느낌마저 든다. 오는 24일까지 대학로 인터파크 서경스퀘어 스콘2관에서 공연한다.
이 연극은 작가의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드라마틱한 사건이 연속되거나 뒤통수가 뻐근해 오는 반전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소소한 일상에서 배어 나오는 잔잔한 에피소드들이 감동의 색감을 진하게 만든다. 그 에피소드들은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이다. 새로운데 낯설지는 않다. 그 낯설지 않음의 힘이 질기고 세다. 일상의 평범함에서 비범함을 잘도 끄집어내는 민준호 작가의 솜씨다. 민준호 작가는 이 연극에 직접 ‘작가’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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