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군사편찬연구소 공동기획 '군인다운 군인' 군인기본자세 캠페인
⑤ 군인정신의 역사적 기원-충성·명예
사회 가치·도덕률 없던 시절부터
삶의 이정표 역할…후손들에 전달
도전·위기 극복한 국가들 간 공유
강군 양성 ‘군인정신’으로 이어져
군인정신의 역사적 기원은 중세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군인정신의 하위 덕목과 내용은 한 시대의 보편적인 표준과 참고가 되며, 세대를 뛰어넘어 후손에게 정체성과 가치관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세대 넘어 전달되는 보편적 정체성과 가치관
모든 사회는 고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다. 어떤 것은 다른 사회와 공유가 가능한 보편적이거나, 또 어떤 것은 배타적이거나 특수한 상황을 담고 있다.
그중에는 시공간을 초월해 타민족과 세계까지 전파되는 경우도있다. ‘충성(Loyalty)’ ‘명예(Honor)’ 같은 정신적 유산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 유산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나의 정립된 관념으로서 ‘충성’과 ‘명예’는 왜, 누가 만든 것일까? 역사와 기록이 없었던 저 먼 옛날, 예를 들면 ‘정체성’ ‘가치관’ 같은 개념이 없었던 중세에도 충성·명예에 대해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까?
충성의 역사적 기원: 카롤루스 마그누스의 ‘충성 서약(Oath of Fealty)’
8세기 말~9세기 초, 카롤루스제국 황제 카롤루스 마그누스(샤를마뉴, 748~814)는 기병의 무력을 키워 이민족을 격퇴하고 서유럽을 제패했다. 기병을 통제하는 방식은 황실 재산을 하사하거나 전리품을 나눠주는 게르만의 전통을 따랐다. 역대 제왕들은 공적이 큰 신하에게 가문의 땅(domaine royal)을 봉토(封土)로 하사하고,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심복(心腹)을 지방에 파견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했다.
카롤루스 마그누스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봤다. 그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 세 가지 전통, 제도를 찾아 혼합했다.
이는 첫째, 게르만족의 종사제(코미타투스·Comitatus)다. 전사들이 따르겠다고 맹세하면 게르만 부족장은 하사품을 내려 약속의 징표로 삼는 관습이었다. 둘째, 고대 로마의 파트로키니움(Patrocinium)이다. 귀족들이 젊은이를 모아 무력 수단으로 삼는 대신 귀족은 그들의 인신을 보호하는 호혜적 관계였다. 셋째, 기독교적 전통으로부터 온 신에 대한 신뢰의 고백이다. 상황이 바뀌고 고난이 닥쳐도 변치 않는 마음, 태도가 핵심이었다. 상기 제도, 전통을 제국에 맞게 변용한 것이 ‘충성 서약(Oath of Fealty)’이다.
카롤루스 마그누스가 황제 제위에 오르기 전인 789년 하달한 칙령 속에 ‘충성 서약’의 예문이 일부 남아 있다.
“나, ○○○은 카롤루스 왕과 그의 아들들에게 충실하게 내 생애 동안 속임수나 악의 없을 것임을 약속한다. 현재에도 장래에도 충성할 것을 확실히 약속한다.”
충성 서약이 가지고 온 변화와 함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충성’이 제왕과 신하 간 관계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서약을 통해 맺어진 관계는 공증인과 종교적 의식이 가미된 공적이고 장기적인 것이었다. 개인에게 불만이 있거나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쉽게 변심할 수 없다.
둘째, 제왕과 귀족이 관계를 맺을 때 평판과 명성 같은 윤리적 요소가 개입하게 됐다. 당대는 유럽의 지배자들이 너도나도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이는 가운데 이민족 침략이 끊이지 않는 혼돈기였다. 따라서 귀족들은 ‘신하와 그 가족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제왕’과, 제왕들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받은 명령을 완수하는 신하’와 충성 서약을 맺고 싶어 했다.
명예의 역사적 기원: ‘명예로운 신하’ 관념
‘명예’는 필요로 만들어진 관념이다. 문헌상에서는 9세기 초 서유럽 제왕들의 칙령에 ‘명예로운 신하’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명예로운 신하’란 제왕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봉토를 하사받은 신하 중에 기병을 거느리고 참전 경험이 있는 자를 일컬었다.
중세 초기 귀족은 태어나면서 받은 ‘혈통’ ‘부’ ‘무력’으로 구별된 존재였다. 그렇다고 해서 귀족의 삶이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가문 내의 한정된 권력을 두고 출생과 동시에 경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9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이민족 침략, 제국 내부의 권력 다툼이 겹치면서 귀족 계층에 위기가 찾아왔다. 두 세대 만에 귀족 가문이 몰락해 사라지기도 했다. 대를 이을 차기 영주 선정을 납득할 만한 기준에 의해 조기 완성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이때 ‘명예로운 신하’ 관념이 기준 역할을 했다. 이 명예로운 신하란 일신(一身)의 무위와 기병 통솔력을 전장에서 입증하고, 용기·헌신·충성심 등의 미덕을 제왕에게 인정받은 ‘귀족 중의 귀족’이었다.
10세기 말에는 ‘충성 서약’의 문구, ‘명예로운 신하’의 덕목에 ‘약자와 교회를 보호한다’는 내용이 삽입됐다. 무력을 가진 자들이 사사로이 약자를 수탈하고 통행을 막아 금전을 요구하며 교회를 억압함으로써 질서를 심각하게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11세기경에는 이민족 침략을 격퇴하고 영토 확장에 기여하며, 사적 무력 행사로부터 약자와 교회를 지키는 자가 ‘명예를 지닌 참된 귀족’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우리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표현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사회 지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의무·책임·실천의 역사적 근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충성과 명예의 결합은 아직까지 사회 가치나 도덕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던 시대에 삶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앞서 서유럽 중세사에서 ‘충성’ ‘명예’의 기원에 관한 기록을 확인하면서 충성과 명예 관념을 ‘역사성을 지난 정신적 유산’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도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있다.
7세기 초 신라시대 화랑의 ‘세속오계’에 충성의 관념이 등장한다. ‘충으로 군주를 섬긴다(사군이충·事君以忠)’는 계율은 ‘충성’에 해당한다. 또한 조선시대 임진왜란(1592-1598) 때 일어난 의병으로부터 명예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이 정의를 위해 행동하고 폭도(暴徒)를 금하며 난리(亂離)를 구한다’는 의병 정신이 ‘명예’에 해당한다.
충성과 명예는 도전과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민족·국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투쟁과 생존의 원칙이다. 역사성을 지니고 있기에 새로운 도전을 만났을 때 권위 있는 참고로 삼을 수 있다.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에 어려운 위기를 만났을 때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 강군을 보유한 국가는 예외 없이 ‘군인정신’ ‘군대 가치관’ 등 정형화된 정체성과 가치관 속에 ‘충성’ ‘명예’를 포함해 장병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남보람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디자인 : 국방출판지원단
'군인다운 군인' 군인기본자세 캠페인은 국방일보 창간 60주년을 맞아 '군, 기(紀) 세우기' 일환으로 군사편찬연구소, 국방부 병영정책과와 함께 진행합니다. 본 캠페인은 각 부대의 군인기본자세 이해 목적으로 제작됐습니다.
감수 : 박동휘 육군3사관학교 교수, 김영환 육군군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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