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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人 사이트] 3代 이은 나라 사랑… 해군은 영원한 나의 가족

입력 2024. 10. 28   17:19
업데이트 2024. 10. 2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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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人 사이트 - 손명원 손컨설팅컴퍼니 대표이사

평생을 바쳐… 
할아버지 ‘걸레 정신’에서
아버지의 ‘창군 정신’까지
30년간 기업인 활약하며
‘해군 사랑’ 이어나가

후대를 위해…
74세에 바다수영 약속 지켜
누구의 것이 아닌 생각·행동
나만의 삶의 철학 고민을

손명원(83) 손컨설팅컴퍼니 대표이사는 ‘영원한 해군 가족’을 자처한다.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손자이자,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의 아들인 그는 해군사관생도와 옥포만을 수영하고, 어머니 홍은혜 여사가 만든 군가를 기증하는 등 부모님의 해군 사랑을 평생 이어가고 있다. 다음 달 11일 제79주년 해군 창설일을 앞두고 손 대표로부터 3대(代)에 걸쳐 이어진 철학과 창군기 해군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15일 서울 서교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글=이원준/사진=김병문 기자

 

‘영원한 해군 가족’임을 강조하는 손명원 손컨설팅컴퍼니 대표이사가 국방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영원한 해군 가족’임을 강조하는 손명원 손컨설팅컴퍼니 대표이사가 국방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할아버님 이야기부터 시작하겠다. 손정도 목사로부터 배운 삶의 철학이 있다고 들었다.

“손정도 목사는 ‘걸레 정신’이란 가훈을 물려주셨습니다. 걸레는 더러운 곳을 깨끗이 닦고 나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죠.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걸레처럼 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걸레 정신이 남들은 피하고 싶어 하는 일을 솔선수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일을 한 뒤 묵묵히 다음을 기다리는 걸레처럼 말이죠.”


- 할아버님의 정신이 아버지 손원일 제독에게로 이어진 것 같다.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기술을 배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차 우리 민족이 살아가기 위해선 남이 모르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죠.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항해기술자의 길로 뛰어드셨죠. 상해에서 바다를 오가는 영국 해군을 보며 ‘중국보다 작은 나라가 전 세계에 힘을 과시하는구나, 그리고 그 중심에 해군이 있구나’라고 느꼈다고 해요. 그래서 배를 움직이는 데 가장 중요한 기술인 항해학을 대학에서 전공했죠. 졸업 후엔 3년간 독일에서 일하며 함부르크부터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전 세계를 항해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귀국하셨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독립하면 대한민국 해군을 꼭 창설해야겠다고 결심한 게 이때였다고 합니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해운사업에 종사하다가 1945년 회사를 정리하고 귀국하셨죠. 그때가 마침 8월 15일이었습니다.”


- 공교롭게도 고국에서 광복을 맞은 셈이다. 

“기차를 타고 역에 도착하니 신문 호외가 나왔다고 합니다.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이었죠. 아버지는 원래 한국에 먼저 와 있던 어머니에게 향할 계획이었다가, 광복 소식에 곧바로 해군 창설 준비에 돌입하셨습니다. 다음 날인 8월 16일부터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23일에는 해군 모집 벽보를 제작해 붙이고 다니셨죠. 독일어, 영어, 중국어에 능통했던 아버지는 미군정도 찾아가 해군을 창설하겠다고 했고, 협의 끝에 해안경비를 담당할 해방병단을 창설했습니다.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가 됐죠.”

 

손명원 손컨설팅컴퍼니 대표이사가 국방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손명원 손컨설팅컴퍼니 대표이사가 국방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당시 어린 나이인데, 어렴풋이 기억이 있으신가.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 전신) 생도들과 함께 군가를 배우던 게 생각납니다. 음악을 전공한 어머니는 생도들이 훈련하며 일본 군가에 한국말 가사를 붙여 부르던 걸 보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작곡, 아버지가 작사한 군가 ‘해방 행진곡’ ‘바다로 가자’는 그래서 탄생했죠. 하지만 정말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생도들이 진해 앞 저도에 들어가 훈련받았는데, 어머니가 풍금을 치면서 교가를 가르치셨죠. 하루는 한 생도가 나한테 오더니 ‘야 어머니한테 높은 음 좀 하지 말라고 해’라고 말하더군요. 배고픈데 소리 내기 힘들다는 이유였죠(웃음). 우습지만 당시엔 참 서글픈 이야기죠.”


-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또 있으신지? 

“사실 우리는 가족이라는 느낌이 별로 없었습니다. 가족이라면 아침, 저녁을 다 같이 먹고 주말에 함께 놀러 가고 해야 하는데 아버님은 광복부터 해군창설, 6·25전쟁, 이후 국방부 장관까지 항상 바쁘셨죠. 어렸을 때 저에게 아버지는 성적 통지표가 나오면 공부 똑바로 하라며 회초리를 드는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한 뒤 하루는 어머니가 아버지 사무실에서 물건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제1부두에 있는 사무실이었죠. 들어가니까 불이 꺼져 있고 컴컴한데, 아버지 의자 뒤에 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이 몸을 삼가 바치나이다.’ 어렸지만 문구를 보며 국가와 민족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삶의 철학이 담긴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70년 만에 이룬 ‘바다 수영’ 약속도 화제가 됐다. 

“당시 생도들이 훈련의 하나로 바다 수영을 했는데, 흰색 수모를 써 먼 바다로 나가면 흰 점으로 보였죠. ‘나도 아저씨들처럼 수영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5년 해군참모총장 이취임식에서 지금도 해군사관생도가 옥포만에서 원영훈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옛날 생각이 나 ‘나도 해보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74세였는데 훈련 참가를 앞두고 부산 앞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 연습하기도 했죠. 2015년에 시작해 2016년, 2017년, 그리고 2019년까지 총 4번을 생도들과 함께했네요.”


- 대표님에게 해군은 어떤 존재인가? 

“나에게 해군은 가족입니다. 형이자 동생이죠.”


- 이제 본인의 이야기를 해주실 차례다. 

“국방부 장관을 마친 뒤 서독대사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독일로 갔습니다. 제가 16살 때였죠. 함께 드라이브를 나선 날, 아버지는 저에게 고속도로를 만드는 기술자가 되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나중에 대학 지원할 때 그 말씀을 따라 토목 전공을 선택했죠. 아버지는 항해사로서 나는 토목공학도로서 출발한 것이죠. 미국에선 경제적 지원 없이 대학 생활을 했습니다. 농장에서,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워싱턴DC의 택시 기사로도 일했죠.”


- 오랜 기간 미국에 계신 것으로 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1980년 귀국했습니다. 임종 사흘 전에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는데, 그날 저녁 비행기를 탔죠. 맥박이 멈춘 아버지 곁을 홀로 지키며 대화하는 것처럼 느꼈어요. ‘이제 한국에 돌아와 어머니를 모시라’고 마치 살아계신 것처럼 전달됐죠. 곧바로 아내에게 전화해 이제 한국으로 오자고 했습니다. 귀국해서는 현대건설 이사를 시작으로 현대중공업 부사장, 현대미포조선 대표이사, 쌍용자동차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 독자들에게, 특히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할아버지는 목회를 하시며 독립운동을 하셨고, 아버지는 해군을 창설하셨죠, 나는 토목을 전공한 기업인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각자가 자신의 삶의 철학을 고민해봤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손정도나 손원일의 것이 아닌, 나 손명원의 생각과 행동을 가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 손명원 대표는?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의 장남으로 1941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진해에서 자라며 창군기 해군 모습을 목격한 산증인이다. “우리나라를 이끌 기술자가 돼라”는 할아버지·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미국에서 토목공학(구조설계)을 전공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다 1980년 귀국해 쌍용자동차·현대미포조선·맥슨전자의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약 30년을 CEO로 활동한 기업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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