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예술
Artist Studio ⑬ 최성임 작가 -각설탕, 양파망, 식빵 끈 등 일상적 소재로 창조하는 공간의 변주
‘집과 하얀 테이블’ 창조의 출발점 삼아
일상·예술 경계 오가는 대형 설치 작업
손 뻗으면 있는 일상 평범한 재료 사용
엮고 잇고 꿰매며 집단적 존재감 표현
다양한 변주 ‘나무’ 시리즈 가장 대중적
단순하지만 시간 들인 ‘공간 마법’ 연출
‘우리 집에는 항상 하얀 테이블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테이블은 우리 모두의 작업 공간이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디자인도 하고, 이것저것 만들 수도 있는 모두의 작업실인 셈이다… 엄마에게는 이 테이블이 작업실이나 마찬가지다. 엄마는 여기서 전시회를 위해 바느질을 하거나, 자르거나, 엮거나, 그림을 그린다. 그러니까 이 하얀 테이블은 우리에게 있어 엄마가 작업하는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는 소중한 장소다. ’최성임 작가와 네 자녀가 함께 쓴 에세이 『네 개의 사과와 하얀 테이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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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네 명의 아이를 키우며 주방의 하얀 테이블을 본인의 작업 공간이자 가족과의 공유 공간으로 삼은 작가가 있다. 육아와 작업을 병행해온 최성임 작가는 결혼 후 가사와 육아로 7년간의 공백기를 보낸 후 다시 작업을 시작하며 따로 작업실을 마련하지 않았다. 부엌의 하얀 테이블, 아이들을 기다리는 차 안과 수영장 등 언제든 작업을 짬짬이 이어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작업 공간이 됐기 때문이다. 최성임 작가에게 집과 하얀 테이블, 무릎 위는 돌봄의 공간인 동시에 작업의 아이디어를 싹틔우고 드로잉과 설계도 제작 등 작품이라는 무대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다.
최성임 작가는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는 대형 설치 작업을 선보여 왔다. 공백기 동안 작가는 시간과 공간에 갇힌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작업을 한다는 것은 예술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기보다 하루 중 한 부분을 가사와 육아가 아니라 예술의 시간으로 사용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반드시 물리적으로 보이는 무엇을 추구했다. “마치 위협적인 상황에서 복어가 몸집을 부풀리듯, 집이라는 공간 속에 갇혀 있는 저는 작고 보잘것없지만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거대한 공간을 점유하는 형태의 설치 작업에 이끌렸어요.” 이렇게 최 작가는 잠시 공간을 점유해 그 공간에 몰입하게 만드는 연극적 상황을 연출한 뒤 홀연히 사라지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이제 최성임 작가의 작품 몇 점을 살펴보자. 집이라는 공간은 초기부터 최성임 작가의 주요 화두였다. 2013년 ‘Missing Home’에서 본인의 나이와 같은 35개의 각설탕 집을 수조에 넣어 녹아내리게 했다. 이 작품은 설치인 동시에 퍼포먼스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녹아서 사라지는 집의 물리적인 변화를 제시한 것이다. 이는 작가의 ‘집’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반영된 것으로, 돌봄과 가사를 위한 공간인 동시에 예술가로서 예술적 시간을 품고 있는 집을 의미하며 작가 최성임의 탄생을 알리는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다. 최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작품은 ‘나무’ 시리즈다.
2015년부터 다양한 변주로 진행되고 있는 ‘끝없는 나무’ 등은 부유하듯 천장에 매달린 구조물의 집합으로, 플라스틱 그물망에 공을 집어넣는 반복적인 행위로 완성된 작품이다. 가볍고 유연한 망과 공들은 무리를 이뤄 대형 작품의 일부가 돼 나무, 꽃, 정원 등의 형태로 제시되며 작품 사이를 오가는 관람자와 상호작용했다. 또 다른 작품으로 ‘황금이불’은 거대한 황금빛 직조물이 천장에서 바닥으로 걸려 있거나, 바닥에 놓인 채로 전시됐다. 최성임이 제작한 황금이불은 거대한 규모(3×4m 내외)와 제작 방식에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작가는 흔히 식빵 끈이라고 부르는 와이어타이를 이어서 실을 짜듯 황금이불을 제작했는데, 한 땀 한 땀 엮어내는 제작 과정은 반복적인 직조의 노동과 그에 투입된 셀 수 없는 시간을 현전하게 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시리즈로 제작돼 설치 공간에 따라 다른 환경을 창조하며 관람객과 조우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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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일상적인 재료들을 선택했다. 농산물을 담는 플라스틱 망과 어린이용 볼풀공, 각설탕, 라이스 페이퍼, 금·은색지, 식빵 끈, 유리, 비닐, 아크릴판 등 한결같이 작고 가볍고 쉽게 옮길 수 있는 것. 유약하고 사소한 자극에도 반응하며, 주변 환경에 의해 형태가 변형되거나 사라질 수도 있는 재료들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반짝이거나 비치는 것, 안과 밖을 투영할 수 있는 재료로 혼자서는 존재감이 약하고 무리로 모여 시너지가 나는 재료들이다. 작가는 이렇게 유약한 재료들을 엮고 꿰매고, 잇고 연결하며 확장해 집단적 존재감과 규모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다.
여기에 최성임만의 작업 방식이 더해졌다. 그는 가능한 시간 언제든 틈틈이 작업했기에, 작은 단위를 반복하며 유닛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묶고, 꿰매고, 쌓고, 뜨개질하는 등 간단한 매뉴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했다. 동시에 손끝의 감각을 활용하고 몸을 써서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방식을 선호한다. ‘수개월간 짠 황금이불’ ‘4만5000개의 공을 플라스틱 망에 집어넣는 작업’ 등 단순하되 무수한 시간을 모아 거대한 설치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최성임의 매직이다. 또한 대부분 천장에 매달려 있거나 위에서 아래로 향하고 있다. 이는 아이들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천장과 벽면을 이용하는 습관과 발 디딜 곳 없던 작가의 정서적이고 물리적인 상황의 반영으로, 마치 천장에 집을 짓는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일련의 설치 작품은 일상의 산업적 재료를 선택해 반복적 노동이 곁들어진 실재적 사물의 조합이자, 물리적 시간을 증명하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수필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혼자 온전히 작업에 몰두할 고립을 위한 조건이다. 최성임 작가도 본인만의 작업실과 온전한 작업시간을 확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작업의 출발이 된 집과 하얀 테이블은 각설탕의 껍질을 벗기는 등의 공동의 작업장이 됐고, 모여 앉아 시간을 나누며 서로를 성장시켰다. 이 공간에서 일상의 사물을 바탕으로 한 창조적인 공동의 노동은 전시장에서 스스로의 집합적 시간을 증명하며 공간을 변주하고 관람자의 미적 체험과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 최근 작가는 IBK 기업은행 본사 로비를 도시정원으로 탈바꿈해 빌딩 숲에 균열을 내고 있다. 을지로를 지나갈 기회가 있다면 딱딱한 사무 공간에 펼쳐진 최성임의 마법을 경험해 보자. 전시는 이달 26일까지.
* 최성임(1977)작가는?
이화여대 서양화과 및 동대학원에서 회화판화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문화재단 신당창작 아케이드(2018)와 송은문화재단 레지던시(2020~2021)를 거쳤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툭 툭》(2023, 온수공간), 《오가닉 스펙트럼》(2022, 이풀 실내정원), 《잠시 몸이었던 자리》(2021, 송은아트스페이스), 《발끝으로 서기》(디스위켄드룸, 2020) 등 9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수원시립아트스페이스 광교, 송은문화재단, 광주시립미술관, 김중업 건축 문화의 집, 세화미술관, 아모레퍼시픽 공공미술프로젝트 등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전시 공간에 설치작업을 선보이고 있으며, 송은문화재단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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