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골목 속으로 - <17>서울 잠실
오래된 주택들 불규칙하게 위치 ‘골목’ 선입견 깬 ‘쉰 살’ 동네…안쪽 상가 밀집지는 옛 모습 그대로 사람 냄새 폴폴
전국구 맛집·멋집 셀 수 없고 거대한 인공호수에 한강도 지척…외국인에게 자신 있게 추천하는 관광지이자 교통 약자의 천국
유럽풍 놀이동산·첨탑형 빌딩, 중세·미래 공존 느낌도…재개발로 사라질 잠실 주공5단지 주변은 꼭 거닐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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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여행을 연재하면서 아파트 밀집지역은 선을 그었다. 오래된 주택들의 불규칙한 배열이 아니라면 골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각형의 아파트들은 거기서 거기라는 편견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아파트촌 서울 잠실은 그래서 관심을 끌지 못했다.
잠실 송리단길에 약속이 있어 갔는데, 다세대주택 천지였다. 낮은 건물들 사이로 감각적인 식당, 옷가게 등이 오밀조밀 섞여 있었다. 잠실새내역 ‘새마을전통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지방 어디에나 있는 재래시장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잠실 주변에 재래시장이 여럿 있는데, 마천중앙시장은 5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잠실 5단지는 1977년 입주를 시작했다. 나이로 치면 거의 쉰 살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 단지 중 하나다.
긴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는 잠실은 서울의 발전이 그대로 녹아 있는 성지다. 골목여행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잠실이 얼마나 보석 같은 곳인지 알아야 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라도 재밌고 행복할 수 있는 곳, 어린이에게도 어른에게도 꿈의 놀이동산이 바로 잠실이다.
잠실이 원래 섬이었다고?
잠실은 여의도처럼 원래 섬이었다.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광주시에 속한, 외진 동네 중 하나였다. 1963년 경기도에서 서울로 편입됐다. 잠실(蠶室)은 ‘누에를 사육하는 곳’이란 뜻이다. 원래는 옷감을 짜기 위해 누에를 쳤던 이 섬은 1970년대 흙으로 메워졌다. 채울 흙이 부족해 연탄재까지 동원됐다고 한다. 1988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선수들의 숙소가 필요했고, 고급 아파트가 줄줄이 세워졌다.
압구정동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아파트촌이 됐고 잠실 주경기장과 롯데월드 어드벤처,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롯데월드타워까지 완공됐다. 유럽을 닮은 롯데월드 어드벤처와 뾰족한 첨탑 형태의 롯데월드타워는 중세 유럽과 미래 도시의 경쟁처럼 보인다. 과거와 미래의 묘한 이질감이 즐겁다. 관광객과 거주민이 뒤섞인 잠실은 여행의 설렘과 일상의 모습이 혼재돼 있어 이 역시 독특한 분위기가 된다. 1970년대 지어진 아파트들이 속속 새 아파트로 바뀌면서 잠실은 하루가 다르게 젊어지고 있다.
상가들이 밀집한 곳은 옛 모습 그대로여서 여기가 잠실 맞나 싶게 촌스럽고 꾀죄죄하기도 하다. 그래서 뜻밖에도 사람 냄새가 폴폴 난다. 잠실에서 맛집은 차라리 못 찾는 게 불가능하고 콘서트, 뮤지컬, 영화 등 볼거리가 풍부해 매주 가도 매번 다른 재미를 기대할 수 있다. 잠실의 골목을 걷는다는 건 대한민국에서 가장 수준 높은 취향의 카페와 식당가를 거닌다는 의미다. 잠실을 빼고 서울을 이야기한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요즘의 서울이 궁금하다면 당연히 잠실로 가야 한다.
세계적인 관광지, 잠실
관광 측면에서 볼 때 잠실은 세계적인 상품이다. 그것도 아주 월등한 상품. 롯데월드는 세계 2등 규모의 실내공원이다. 글로벌한 쇼핑몰과 놀이공원이 연결돼 있고 놀이공원은 실내와 실외, 양쪽에서 모두 즐길 수 있다. 지하철역에서 내리기만 하면 비현실적인 세상이 바로 펼쳐진다. 쇼핑몰·식당가·전망대·아쿠아리움 등이 종합선물세트처럼 구성돼 있고, 거대한 인공호인 석촌호수는 빌딩숲과 좋은 대조를 이루며 고요하게 일렁인다. 조금만 더 걸으면 한강이다. 저렴한 서울시 자전거 따릉이를 타고 석촌호수와 한강을 둘러보면 최고의 소풍이 완성된다.
음식점 역시 다양하다. 젊은 친구들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과 디저트카페를, 나이 지긋한 중장년들은 고깃집과 횟집 또는 장어집으로 향한다. 전 세계에 이보다 거대한 상권이 과연 있을까? 지구촌에서도 거의 유일무이한 진귀한 곳인데, 한국인은 한국에 있다는 이유로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서울에서도 부촌이라 거리도, 공원도, 편의시설도 관리가 아주 잘돼 있다. 어떤 나라는 치안이 좋지 않고, 노숙자가 너무 많다거나 오후 8시면 죄다 문을 닫는 등 한두 가지 단점이 꼭 있다. 이렇게 안전하고 들뜬 분위기의 쾌적한 곳은 흔치 않다. 잠실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 단순히 아파트가 많은 동네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중심가가 바로 잠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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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이 만든 특이한 정체성
잠실을 이야기할 때 ‘롯데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맞나?’ 조금은 망설여진다. 사기업이고, 사기업이 한 지역의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그 지역에 모독이 될 수 있어서다. 지하철 잠실역에서 내리면 누구라도 잠시 멍해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지하상가 사이로 어디가 롯데월드 어드벤처이고, 어디가 롯데월드타워인지 도대체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1988년 롯데백화점을 시작으로 호텔과 롯데월드 어드벤처가 생겨나면서 본격적인 복합쇼핑몰 시대를 연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에 초대형 시설을 한꺼번에 짓는다는 건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큰 모험이었다. 높이 555m,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 롯데월드타워는 날씨만 좋으면 경기도 분당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휠체어 없이는 외출이 불가능하다. 그 친구 때문에 휠체어로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에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전국의 손꼽히는 맛집·빵집·체인점들이 몰려 있는 롯데월드몰은 그 몇 안 되는 공간 중 하나다. 휠체어를 타고도 여유롭게 다닐 수 있고, 추위와 비 등 궂은 날씨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완벽하게 청결한 장애인용 화장실은 덤이다. 성냥갑 아파트에 가려져 잠실의 진가를 늦게 알아봤다. 휠체어 친구와 만날 땐 그래서 무조건 잠실이다. 잠실은 이동이 불편한 이들에게 참으로 고마운 곳임을 이제는 안다.
외국인 친구가 맛집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주저 없이 잠실로 가라고 하겠다. 잠실이 속한 송파구는 인구가 무려 65만 명이다. ‘구’ 단위로는 가장 많은 사람이 산다. 웬만한 지방 도시보다 인구가 훨씬 많다. 게다가 롯데월드를 찾는 관광객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해외에서, 전국 지방에서 몰려드는 이들로 잠실 주변은 늘 축제 같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는 법. 우리나라 최고의 맛집은 모두 잠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 각지의 실력자들이 잠실에 문을 연다. 베이글 맛집 ‘런던 베이글’, 전남 함평의 딸기 케이크 맛집 ‘키친205’,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블루보틀’ 등 오픈런을 해야 하는 맛집이 유난히 많다.
잠실에 자주 오는 사람이라면 줄 서는 집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비슷한 메뉴를 파는데 절대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 식당과 카페가 널리고 널렸다. 송리단길 멕시코음식점 ‘갓잇’, 잠실새내역 일식집 ‘탄포포’ 등은 일부러 찾아가는 단골 맛집이다.
걷고, 뛰고, 타고…이보다 더 신날 수 없다
잠실은 산책과 걷기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곳이다. 석촌호수 주변은 주민들이 뛰고 걷는 곳이며, 동시에 연인들이 손을 잡고 수줍게 사랑의 온기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호수 주변의 카페나 맥주를 파는 술집에 앉아 있으면 흡사 유럽의 어디쯤에 있는 듯한 이국적인 느낌도 난다. 봄이면 벚꽃이 만발해 인생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며, 송파구청 내부의 카페는 웬만한 일반 카페보다 시설이 좋다. 게다가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자전거 따릉이는 얼마나 많은지, 자전거 데이트 최고의 장소 역시 잠실이지 싶다. 자전거를 타고 석촌호수와 올림픽공원 주변을 돌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하루가 완성된다.
아파트가 많은 곳을 굳이 여행한다고? 그것도 편견이다. 얼마 전 부산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덴마크 친구는 서울이 영국 런던이나 프랑스 파리보다 백배는 아름답다고 극찬했다. 우리에겐 익숙한 한강과 아파트, 공원과 자전거가 선진국 사람에게도 특별해 보인다는 걸 잊지 말자.
한때는 섬이었고 뽕나무로 가득했던 잠실이 이젠 아파트로 빼곡하다. 이 아파트 역시 영원할 리 없다. 언젠가는 사라질 풍경이니 특히나 5단지 주변은 일부러라도 거닐어 볼 일이다.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번듯하고 훨씬 키가 큰 아파트들로 채워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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