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현대 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혁명-개혁, 길은 달랐지만 언 땅에 뿌리 내린 ‘지성’

입력 2024. 10. 08   16:52
업데이트 2024. 10. 09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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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19. 9세기 자유주의(하) - 특히 프랑스와 영국에서 꽃을 피우다! 

대혁명의 후예 I 프랑스
나폴레옹 몰락 뒤 부르봉 왕조 복위
샤를 10세·7월 왕정 보수화에 대항
두 번의 ‘봉기’ 끝에 값진 열매 맺어
자유주의 모범 I 영국
명예혁명 이후 의회민주주의 정착
참정권 확대, 사회·경제 개혁 물꼬
노동조합 합법화·자유무역제도로…

 

프랑스 7월 혁명(1830년 7월)을 그린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출처=위키백과
프랑스 7월 혁명(1830년 7월)을 그린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출처=위키백과


19세기 동안 유럽 지성사를 선도한 키워드는 ‘자유(自由)’였다. 물론 개인을 자유와 해방으로 이끌 주체의 성격과 수단에 관해서는 저마다 의견이 상이했다. 그렇다면 각자 강조점이 달랐던 자유주의는 당대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달성됐을까? 이와 관련해 이번 호에서는 대조적인 자유 확장의 길을 걸어간 프랑스와 영국의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프랑스에서 자유주의는 대혁명에서 무산된 꿈인 공화제의 재(再)성취를 향한 역동적 혁명의 모습으로 전개된 데 비해 일찍부터 정치적 안정을 이룬 영국에서는 점진적인 선거권 확대와 대중정당제도의 정착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1815년 약 20년 동안 유럽을 좌지우지한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온갖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남은 옛 기득권층이 재차 역사 전면에 등장했다. 정통주의(正統主義)에 입각해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는 부르봉 왕조가 복위했다. 보수반동 세력이 재차 득세하면서 유럽 각지에서 자유주의 운동이 탄압받았다. 빈 회담 직후 전승국은 국제적 동맹을 결성해 자유주의 운동을 무력으로 짓눌렀다. 독일 지역에서 대학생 중심으로 일어난 학생조합운동은 ‘칼스바트 포고령’으로 철퇴를 맞았다. 이탈리아에서 민족의 자유를 외친 카르보나리당의 봉기는 오스트리아 점령군의 진압으로 좌절됐다.

이처럼 암울한 시기에도 대혁명의 후예답게 프랑스인이 재차 자유의 깃발을 들어 올렸다. 빈 회담 이후 복위된 부르봉 왕조의 루이 18세는 온건한 보수정책 시행으로 가능하면 개혁세력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1824년 그를 계승한 샤를 10세는 자유주의 세력의 존재를 무시하면서 강력한 보수반동정책을 추진했다. 보상정책이라는 미명하에 프랑스혁명 와중에 해외로 도피했다가 귀국한 과거 귀족들의 재산상 손실을 국민 세금으로 충당해 주고, 보수 성향이 강한 폴리냑 공(公)을 내각 수반으로 임명해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했다. 점차 불만이 쌓인 자유주의 세력은 1830년 7월 파리에서 봉기를 일으켜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개혁 성향의 루이 필립을 추대해 ‘7월 왕정’(입헌군주정)을 출범시켰다.

그렇다면 7월혁명으로 프랑스인은 원하는 자유를 얻었을까? 아쉽게도 자유의 성취는 더 많은 희생을 요구했다. 루이 필립의 ‘7월 왕정’은 점차 초심을 잃고 보수화해 상층 유산계급 위주의 정치를 일삼았다. 반대세력 항의에도 아랑곳없이 보수정치로 일관하자 프랑스인들의 불만이 재차 분출했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대해 2월혁명을 일으켰다. 정부가 무력 진압에 실패하면서 이번에는 루이 필립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제2공화정이 수립됐다. 프랑스 2월혁명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 유럽 국제정치를 좌우한 보수반동 성격의 빈 체제에 타격을 가해 이를 최종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다. 비록 어렵게 성취한 공화정은 곧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프랑스의 경우 자유주의로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나 일단 뿌려진 ‘자유’의 씨앗은 언젠가는 동토를 뚫고 나와 열매를 맺는다는 진실을 보여줬다.

19세기 자유주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모범국은 17세기 말 명예혁명 이래 의회민주주의가 정착돼온 영국이었다. 이른 시기에 정치적 안정을 달성한 영국에서는 각 방면에서 점진적인 변화가 꾸준히 이어졌다. 우선 정치면에서는 1832년 이래 일련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 19세기 중순경 자유당과 보수당을 축으로 한 양당 정치제도가 정착돼 평화로운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경제면에서는 곡물법 폐지로 자유무역제도가 채택돼 국제교역을 활성화했고, 사회 면에서는 1833년 이후 일련의 공장법이 제정돼 노동자들의 노동환경과 노동조건을 개선했다.

그런데 이러한 영국의 개혁 작업이 애초부터 순탄하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격렬하게 전개된 유럽대륙의 경우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영국에서도 자유를 위한 ‘희생’이 있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의 국내 사정은 매우 불안정했다. 과잉생산 및 실업자 급증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됐다. 정부가 단행한 곡물법 제정(1815) 및 인신보호령 정지(1816) 등에 대한 노동자들의 항의 집회를 당시 웰링턴 총리의 토리 정부가 군대를 투입해 강제적으로 해산했다. 이러한 반동정치 과정에서 피털루 학살사건(1819)과 같은 심각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18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영국에서는 변화를 거부하는 정치가 종식되고 다방면으로 개혁 분위기가 조성됐다. 1824년 결사금지법이 폐지돼 노동조합 활동이 합법화됐고, 가톨릭 해방법 제정(1829)으로 종교상의 차별 요소가 제거됐다.

무엇보다 정치면에서 1832년 선거법이 개정돼 참정권이 확대되고, 그 영향으로 양당정치 제도가 정착했다. 18세기 말 이후 본격화한 산업혁명 영향으로 농촌 인구가 새로 형성된 산업도시로 대거 이동하면서 기존 의회 구성과 선거법의 모순이 심화했다. 대폭적인 농촌 인구 감소로 기존 선거구를 재조정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찰스 그레이 총리가 제출한 선거법 개정안이 우여곡절 끝에 의회를 통과(1832)하면서 선거구가 재조정되고, 잉글랜드 중북부의 신흥 산업도시들에 하원 의석 65개가 할당됐다. 특히 유권자 재산 자격 완화로 신흥 산업가 계층 위주로 신규 선거권자가 최대 80만 명까지로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자유당과 보수당이라는 대중정당 출현을 자극했고, 양당을 이끈 윌리엄 글래드스턴과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전국 차원의 정치가로 부상했다.

정치면에서 물꼬를 튼 개혁의 물결은 곧 사회·경제면으로 이어졌다. 경제는 나폴레옹 전쟁 직후 국내 지주계층 이익을 보호할 목적으로 제정된 곡물법 폐지를 꼽을 수 있다. 해외 수입 곡물에 고율의 관세가 부과되면서 수입량이 제한되자 곡가(穀價)가 상승, 이것이 노동자 임금 및 공업제품 가격 인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산업가 계층을 중심으로 한 곡물법 반대 세력에 굴복한 자유당 정부는 1846년 곡물법을, 1849년에는 항해조례까지 폐지했다.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주창한 경제적 자유주의가 현실적으로 실현돼 자유무역제도가 확립되고, 궁극적으로 산업자본의 힘이 과시됐다. 동시에 일련의 공장법이 제정돼 아동노동 환경이 크게 개선됐다. 제반 관련 법 가운데 1833년 제정된 공장법이 가장 주목받았다. 이때 9세 이하 아동 고용 금지 및 연령에 따른 노동시간 규정(13세 이하 9시간, 18세 이하 12시간) 등의 조항이 신설되고, 무엇보다 법 이행을 감시할 유급 공장 감독관이 임명됐다.

19세기 자유주의의 전개 양상은 각국이 처한 상황에 따라 그 양태가 달랐다. 앞에서 살펴본 프랑스와 영국의 사례에서 그러한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프랑스가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일련의 혁명을 통해 자유의 진전을 이룬 데 비해 영국은 자유당과 보수당이라는 양 정당을 중심으로 의회 내에서 논쟁과 타협을 통해 개혁 관련법을 제정하는 방식으로 자유주의 이념을 현실화하고 점진적으로 개인 자유의 폭을 넓혔다. 이처럼 자유주의를 향한 여정은 개별 국가와 공동체가 처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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