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여름학기에 흔하지 않은 강의가 열렸다. 변호사이자 헤지펀드 매니저인 젊은 강사 피터 틸(31)이 개설한 강의 ‘화폐시장의 글로벌 개방과 정치적 자유의 관계’는 수강생이 6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겪고 부모를 따라 이민 온 학생 맥스 레브친(23)만 눈을 반짝였을 뿐이다.
레브친이 점심을 먹으면서 개인 휴대기기에 디지털머니를 암호로 저장하고 결제하는 전자지갑 아이디어를 제시하자 틸은 투자하겠다고 나서며 창업을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강사와 학생이 각각 최고경영자(CEO)와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은 온라인결제서비스 기업 필드링크(Fieldlink)가 탄생했다. 필드링크는 컨피니티(Confinity)를 거쳐 엑스닷컴(X.com)과 합병하면서 페이팔(Paypal)로 거듭났다.
페이팔을 이끈 초창기 구성원의 면면을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다. 초대 CEO를 맡은 일론 머스크는 엑스닷컴, 스페이스X, 오픈AI, 테슬라 같은 내로라하는 스타트업을 창립하고, 트위터까지 인수했다. 2대 CEO인 피터 틸은 팔란티어를, CTO 맥스 레브친은 슬라이드를, 최고재무책임자(CFO) 데이비드 삭스는 야머를, 최고운영책임자(COO) 리드 호프먼은 링크드인을 창업했다. 또 웹디자이너 채드 헐리와 엔지니어 스티브 첸, 자베드 카림 셋이 모여 유튜브를 설립했다. 이른바 ‘페이팔 마피아’다.
큰 틀에서 페이팔 마피아는 학연과 혈연으로 이어진다. 학연은 스탠퍼드대와 일리노이대(어바나-샴페인) 출신으로 연결된다.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없지만, 큰 틀에서 상당수가 유대인이다. 틸이 독일 출신, 레브친이 우크라이나 출신, 삭스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루크 노섹은 폴란드 출신으로, 창업 멤버 15명 가운데 무려 9명이 유대인이다.
유대인 인맥은 페이팔 마피아 밖으로도 확산된다. 피터 틸의 요청으로 페이팔에 초기 투자한 클라리움캐피털의 케빈 하트와 대규모로 투자한 세쿼이아캐피털의 마이클 모리츠는 물론 페이팔을 15억 달러에 인수한 이베이의 멕 휘트먼도 유대인이다. 피터 틸에게 초기 투자를 요청한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세쿼이아캐피털에서 투자를 받은 구글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도 유대인이다. 한 번 맺은 관계를 헌신적으로 지키는 유대인의 ‘헤세드(Chesed)’ 정신 덕분에 가능한 네트워크다.
이 같은 유대인의 창업 성과는 이스라엘의 국방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이스라엘은 기필코 살아남기 위해 과학기술과 교육, 창업에 승부를 걸었다. 이스라엘에선 아예 군대가 창업의 요람이다. ‘최고 중의 최고’를 자랑하는 사관학교 ‘탈피오트’와 사이버전투를 담당하는 정예부대 ‘8200부대’다. 이들 출신이 군대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으로 스타트업을 창업한다. 이스라엘은 인구 1400명에 한 명꼴로 스타트업이 많다. 나스닥에 상장한 스타트업 수로 보면 미국과 중국에 이어 3위다. 그야말로 스타트업 강국이다.
‘탈피오트’를 벤치마킹해 ‘과학기술전문사관’을 운영하고, ‘8200부대’에 대응하는 사이버작전사령부도 창설했다. 매년 열리는 ‘국방창업경진대회’도 갈수록 알찬 성과를 내고 있다. 제도는 흉내 낼 수 있지만 문화는 베낄 수 없다.
국방에서도 창업생태계가 번성해야 한다. 신박한 기술과 정교한 제도만으로 창업생태계가 진화하진 않는다. 유대인의 헤세드 정신처럼 우리 고유의 문화가 필요하다. 스타트업 거인들이 서로 어깨를 내주면서, 높은 꼭대기로 끌어주고 떨어져도 받아줄 수 있는 넓으면서도 촘촘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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