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18. 19세기 자유주의(중) - 개인의 사회경제적 자유를 주창하다 !
자유주의 옹호자들 사유 재산권 중요시
애덤 스미스 ‘국부론’ 벤담 ‘공리주의’
인간의 본성 찾고 개인의 중요성 인정
경제적·자유방임적 자유주의 발전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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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더불어 19세기 이후 지성사를 지배하는 또 다른 단어는 바로 ‘평등(平等·equality)’이다. 20세기 이후 지구상의 각국 정부는 바로 이 자유와 평등 간 접점을 어느 선에 둘 것인가를 놓고 국내 정치 무대에서 좌우 진영 간 경합을 벌여오고 있다. 자유를 최대한 강조한 것이 자유방임, 오늘날 용어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고 한다면 평등을 최대한 강조한 것은 사회주의와 더불어 이의 극단적 형태인 공산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 말까지는 주로 자유 쪽에 방점이 찍혀 있다가 20세기 접어들면서 평등 쪽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는 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의 영위를 위한 최소 조건을 정부(=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복지국가의 출현으로 현실화됐다. 바로 오늘날 현대사회의 중요 화두인 자유주의의 사회경제적 측면을 말한다.
원래 자유주의 철학 기반인 개인주의에는 독립자존과 소유(=재산권)라는 두 관념이 밀접하게 결합돼 있다. 본질적으로 자유는 욕구(desire)의 실현이기에 물질 소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자유주의는 (시장)자본주의와 공생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식자(識者)들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으로 전자가 재산 소유를, 후자가 나이를 기준으로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점을 들곤 한다.
19세기에 자유주의 옹호자들은 특히 재산권(property rights)을 매우 중요시했다. 사유 재산권을 책임 있는 판단 실행과 확고한 시민권 획득을 위한 핵심적 전제로 믿었기 때문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재산권의 중요성을 학문적으로 처음 제기한 지식인은 17세기 영국의 대표적 정치 철학자인 존 로크였다. 그는 인간의 자연권 가운데 ‘재산소유권’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강조했다. 그는 개인들이 국가를 형성하고 자발적으로 정부 지배를 받으려는 최대 목적은 바로 자기 재산의 보존 때문이라고까지 말했다. 따라서 로크에게 있어 자유는 다름 아닌 법에 의한 통치와 재산권 보호였다: “자유란…자신에게 허용되는 법의 한도 안에서 자기 자신, 행위, 소유물,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관리할 자유다. 그러한 과정에서 다른 개인의 독단적 의지는 결단코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 코먼웰스를 형성하는 가장 원대하고 주된 목적은…사유재산 보호에 있다.”
자유주의가 개인의 사유 재산권이라는 물적 토대 위에서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자유주의의 핵심 요소인 ‘경제적 자유주의’가 보장돼야만 했다. 기본적으로 경제 분야에 대한 전통적 자유주의자의 입장은 ‘자유방임주의’였다. 이는 대내적으로 개인의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불간섭과 대외적으로 관세가 사라진 자유무역을 의미했다. 18세기 중상주의 정부가 보호관세를 통해 경제활동을 규제해온 관행에 대해 반대하는 개념이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재산 소유자들이 부당한 규제 없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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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자유의 극대화는 제약의 극소화를 통해 달성되기에 국가(=정부)의 역할은 불요불급한 경우 및 분야에 한해 최소로 제한돼야 한다고 설파했다. 심지어 자유로운 국제교역 활성화를 통해 전쟁 행위조차 방지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표출했다. 자본주의의 아버지 격인 애덤 스미스가 명저 『국부론』에서 제시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모든 것을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조정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가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데 사회나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입하거나 조정하는 행위는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으로, 결국에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봤다.
애덤 스미스가 경제적 자유주의를 옹호한 근본 원리는 그가 경제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인간의 본성(本性)에서 찾은 데 있었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경제생활의 기본원리로 인식했다. 그는 “신이 인간에게 두 가지 본성을 부여했는데, 하나는 이타적 본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기적 본성이다. 이타적 본성은 도덕 생활의 동기가 되고, 이기적 본성은 경제생활의 동기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이기심이 있고, 그것은 신이 부여한 본성이기에 이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정당했다. 이는 개인의 사익 추구를 부정한 것으로 보던 전(前)근대적 경제관을 뒤집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경제적 측면에서 주창한 ‘자유방임’의 이론적 토대는 19세기 전반기 영국에서 크게 풍미한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에 있었다. 벤담이 내세운 공리주의의 핵심은 인간 행동은 쾌락과 고통에 의해 지배된다는 ‘공리(功利·utility)’의 원칙에 있었다. 이는 쾌락(행복)의 증진 또는 감소라는 기능에 따라 어떤 행동을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원리였다. 옳은 행위란 최소한의 고통과 더불어 최대한의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회제도와 법은 그것의 사회적 유용성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창출하는지 여부에 따라 평가돼야만 했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자유방임적 자유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무엇보다 공리주의자들은 개인의 중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개인의 고통과 행복에 대한 최선의 판단 주체는 바로 개인 자신이라고 봤다. 사회 전체의 행복은 개인 행복의 총화(總和)이기에 사회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행동은 자유롭게 방임돼야만 했다. 개인의 자발적 행동을 제약할 경우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기에 국가가 개인의 행동에 간섭해서는 안 됐다.
이처럼 신성한 사적 재산권에 근거한 (고전적) 자유주의는 다름 아닌 ‘소유적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였다. 이에 의하면 개인은 신체와 능력의 소유자며, 사회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지 않는 존재이기에, 바로 그 개인이 노동을 통해 생산하는 재화를 그의 소유로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소유적 개인주의’의 출발점이었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사유재산을 ‘개인적 자유의 구현물’로 인식했기에 근대사 전개 과정에서 그토록 집요하게 개인의 재산권 보호에 집착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개인적 해방’이란 신체적 권리와 함께 재산의 권리에 대한 국가의 강제 혹은 제약으로부터의 자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면 이러한 ‘자유방임’에 기초한 고전적 자유주의로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그에 따른 요구를 모두 담아낼 수 없었다. 1880년대 이후 산업화로 인한 문제점이 심각하게 드러나면서 국가가 일종의 ‘야경국가’로만 남아 있을 수 없게 됐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만을 신봉한 채 절대왕정의 억압을 타파하는 선에서 멈춘 고전적 자유주의의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19세기 말 영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그린이 주창한 ‘공동선(common good)’ 실현에 필요한 ‘적극적 자유(무엇을 하기 위한 자유)’ 개념을 담고 있는 사회적 자유주의가 시대적 화두로 대두했다. 급기야 학문 영역을 넘어서 20세기 초반 영국 자유당이 주도한 ‘복지국가’ 건설의 이념적 기반이 됐다. 이제 국가는 개인 자유의 보장은 물론 공동체에 속한 개인이 한 인간으로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적(物的) 조건도 보장해 줘야만 하는 책임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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