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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다듬던 할매 물 짐 진 할배 마주앉아 도란도란 이바구 꽃피우다

입력 2024. 09. 12   16:31
업데이트 2024. 09. 12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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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골목 속으로 <16> 부산 이바구길 

살기 위해 굶기지 않기 위해
오르락내리락
지나온 세월만큼 굴곡진 길
어르신들 이야기 넘치는 길
산복도로 비탈길 버스, 놀이기구 탄 듯
공장 카페·168 계단·재치 넘치는 벽화
감동 속 희로애락 몰려와

‘이바구’는 부산 사투리로 ‘이야기’를 의미한다. 6·25전쟁 당시 전국에서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연고도 없고, 돈도 없는 피란민들이 변변한 집이 있을 리 없다.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 산비탈에 터를 잡고, 무허가 판잣집을 짓기 시작한다. 물러설 곳이 없으면, 독기만 남는다.

전쟁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매일 가파른 경사를 오르내리며 먹을 것을 구해 오고, 물을 길어 나르던 길. 역사 속 그 생생한 희로애락이 바로 이바구길이다.

신축 아파트로 멀끔한 해운대가 부티야 더 나겠지만, 이바구길은 이야기 부자다.

골목에서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파를 다듬고, 여행자에게나 놀라운 풍경을 배경 화면으로 할아버지는 동네 슈퍼마켓으로 들어간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경사를 빼곡히 채운 집들도 그림이다. 지구에서 가장 비싼 풍경이다.

이바구길 골목 정상에서 내려다본 부산 동구의 전망. 산비탈에 집들이 서로 기댄 듯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바구길 골목 정상에서 내려다본 부산 동구의 전망. 산비탈에 집들이 서로 기댄 듯 다닥다닥 붙어 있다.



산비탈을 연결하는 거미줄 길

부산 동구엔 여러 이바구길이 있다. 초량 이바구길, 호랑이 이바구길 등등.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은 임시 수도가 된다. 가난한 부두 노동자들의 판잣집으로도 모자라 피란민들은 산꼭대기까지 다닥다닥 집을 지었다. 산복도로의 복은 배를 뜻하는 한자어다. 산의 배를 가로지르는 길을 산복도로라고 한다. 산복도로의 다른 이름이 바로 이바구길이다. 부산은 해안까지 산자락이 이어질 정도로 평지가 적고, 산이 많다. 산이 집들로 빈틈없이 채워지자 당연히 길이 필요했다. 차도 다닐 수 있는 그런 길. 산복도로가 부산의 산과 산을 연결하며, 주민들의 숨통 역할을 한다. 부산 최초의 산복도로는 1964년 초량에서 시작됐다. 초량 이바구길을 걷는다는 건, 부산의 역사를 걷는 것과 같다. 경사진 비탈길을 오르는 버스들은 차라리 놀이기구다. 농담이 아니라 외국인 친구들에겐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이런 곳까지 버스가 올라와? 겁을 먹고 버스에 오르면 어느새 버스는 부산 동구의 전망이 한눈에 보이는 곳까지 여행자를 데려다 놓는다.


부산역에 내리자마자 시작되는 여행

부산역에 내리면 바로 숙소로 가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동선상 큰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길만 건너면 바로 차이나타운이고, 초량역도 걸어서 5분 거리. 일단 차이나타운은 대표적인 만두 성지다. ‘신발원’과 ‘마가만두’가 쌍두마차지만, 다른 중국집들도 기본은 한다. 차이나타운에서 만두만 먹고 나오면 절대 안 된다. 근처 ‘마루팥빙수’ 역시 재료가 금방 소진되는, 부산 대표 팥빙수 전문점.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한다. 팥빙수까지 먹으면 배는 찰 대로 찼다. 1927년 세워진 병원 건물을 개조한 카페는 그럼 어떻게 하지? 빙수를 먹었는데 차를 마시는 건 아무래도 무리. 하지만 걱정하지 말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역으로 어차피 한 번 더 와야 한다. 그때 꼭 이곳으로 오자.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 종합병원이었던 백제병원은 중국집으로, 중국집에서 또 예식장으로 쓰임이 바뀌다가 지금의 카페가 됐다. 일제 강점기 시절 서양식 건물의 매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초량역 주변은 곰장어집, 기사식당, 돼지 국밥집 등이 몰려 있는데, 현지인들이 인정하는 맛집이다. 초량로 입구 ‘경북산꼼장어’는 부산 대표 맛집이다. 이보다 맛있는 곰장어를 먹어본 적이 없다. 초량로로 들어가면 현지인들의 단골 맛집으로 가득한 진짜 부산이 나타난다.




눈이 즐거운 이바구 버스 여행

초량역에서 이바구길을 어떻게 여행할까? 북콘서트 때문에 부산을 왔는데, 마침 돌아가는 날. 한 손엔 캐리어가 있어 걸어서 오르는 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낮 기온이 33도까지 오르는 무더운 날이기도 했다. 다행히 산복도로를 오가는 버스가 10분마다 있다. 참 고마운 세상이다. 이런 편리함은 절대 당연한 게 아니다. 피란민들은 날이 덥건, 배가 고프건 무조건 걸어서 이 길을 오르고, 내려야 했다. 목적지는 ‘초량 845’ 카페. 공장을 개조한 이 카페는 조망이 아주 좋다. 부산 골목 여행은 일정한 패턴이 있다. 산비탈의 집들, 그 집들을 연결하는 실핏줄 같은 골목들, 위로위로 올라가면 결국엔 펼쳐지는 웅장한 전망. 전망의 핵심은 다닥다닥 집들이다. 그 집들이 모자이크처럼, 거대한 그림이 돼 여행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우린 그냥 산다. 이왕이면 후회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산다. 이바구길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열심히 살았던 흔적이 이바구길 주변에 가득하다. 힘든 시간이 없었다면 감동이 훨씬 덜했겠지. 걸어서 왔더라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 풍경을 봤더라면 눈물도 찔끔 났을 것 같다.


평생 이바구길에서 산 할머니, 할아버지

여기까지 왔는데, 이바구길 명물 168 계단은 보고 가야지. 걸어서 14분 거리. 짐이 많다고 포기하기엔 너무 코앞이다. 아파트 단지의 평지길이라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어디든 거기서 거기, 지루하기 짝이 없다. 오르락내리락, 거대한 구렁이 같은 길은 담쟁이덩굴로 가득하거나, 재치가 넘치는 벽화로 채워져 있다. 주차장에 있는 말 그림이 기발하고, 재밌었다. 옛날엔 말, 지금은 자동차라는 건가? 이바구길을 걷다 보면 골목 사이사이로 부산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멈추고, 보고, 걷고.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이 너무 신기해서, 왜 이곳을 나만 걷고 있을까? 핫한 곳만 몰려다니는 여행자들이 조금은 아쉽다. 유난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산 할머니, 할아버지일 것이다. 세상엔 태어난 곳에서 죽는 사람과 태어난 곳에서 멀리 떨어져서 죽는 사람, 둘로 나뉜다. 평생 한 곳을 지킨 이들의 주름은, 진귀한 감동이다.


이바구길 근방 카페.
이바구길 근방 카페.



이바구길 명물 168 계단과 모노레일

168 계단 옆엔 모노레일이 있다. 모노레일은 안전상 이유로 경사형 엘리베이터로 교체공사 중이었다. 국방일보 독자들에게, 빨간 장난감처럼 생긴 모노레일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옛날의 이바구 사람들이 그랬듯이, 두 발로 168 계단을 내려간다. 다행히 내리막길이다. 예전엔 모노레일은 당연히 없고, 168개의 계단뿐이었겠지. 수도 시설이 없어 물도 길어 날라야 했다. 무겁디무거운 물을 짊어지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을 그때의 어머니, 아버지를 상상한다. 그나마 무릎이라도 성한 사람들은 할 만한 고생이었겠지만, 열 걸음도 버거운 노인들에겐 위험하고, 잔인한 계단이었을 것이다. 이바구길은 볼 게 참 많은 곳이다. 심지어 주차장조차 재밌는 골목이다. 완성도 높은 벽화들, 감각적인 카페도 여기저기 숨어 있다. 현지인의 일상이 공존하기에 훨씬 진귀한 길이고, 골목이다. 영원한 건 없다. 100년 후엔 이바구길도 아파트로 채워지지 않는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겠는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애틋해진다. 더 말끔해지는 것도 반갑지 않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천천히 숙성해 주기를…. 나보다 더 이곳을 사랑하고, 감동해 줄 여행자들을 기대하며 천천히 평지의 땅으로 내려온다.


필자 박민우는 ‘25박 26일 치앙마이 불효자 투어’ ‘1만 시간 동안의 남미’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 등을 쓴 여행작가다. 방송을 통해 세계 각지의 삶과 문화를 전달하기도 했다.
필자 박민우는 ‘25박 26일 치앙마이 불효자 투어’ ‘1만 시간 동안의 남미’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 등을 쓴 여행작가다. 방송을 통해 세계 각지의 삶과 문화를 전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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