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에서 만나는 2024 트렌드 - 텍스트 힙
‘독서=힙하다’ 생각 아이돌 추천 도서 베스트셀러 등극·책 관련 행사 북적…시 감상·편지쓰기·필사, 힐링 상징·트렌디한 취향으로 각광
지난 2월, 걸그룹 ‘르세라핌’ 멤버인 허윤진이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에 출연해 대기실에서 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독서에 열중하는 모습이 화제를 모았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그가 방송에서 추천한 도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1)가 젊은 소비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지며 20대 판매량이 방송 전월 대비 93.8% 상승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다. 방탄소년단의 RM, 가수 아이유 등 유명 연예인이 방송이나 영상 속에서 읽던 책이 팬들 사이에서 ‘필독서 리스트’로 통하며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현상이 종종 발생한다. 아이브의 장원영이 소개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2), RM이 읽던 『다시 그림이다』(3), 뉴진스의 뮤직비디오에 노출된 『순수의 시대』(4) 등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돌에게 ‘독서돌(독서+아이돌)’이라는 애칭을 붙일 만큼 책을 읽는 모습은 요즘 1020세대에게 ‘지적인’ ‘깊이 있는’, 나아가 ‘힙한’ 이미지로 통하는 것이다.
단지 우상(idol)이 읽기 때문이 아니다. 종이책, 독서 관련 굿즈와 행사, 나아가 글을 쓰는 것까지 요즘 소비자들에게는 구시대적 취미가 아니라 트렌디하며 멋진 취향으로 통한다. ‘텍스트 힙’, 다시 말해 가장 흔한 매체가 돼 버린 사진이나 영상이 아니라 따분한 것으로 여겨지던 글자(text)가 곧 힙(hip)함의 상징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특히 주목받는 텍스트는 ‘시(詩)’다. 1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젊은 층이 시를 찾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해 6월까지 시집을 구매한 연령대 중 20대가 26.5%, 30대가 20.2%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예스24는 10대의 시집 구매량이 지난해 대비 124.1% 증가했다고 밝혔다. 영상조차 1분을 넘지 않는 숏폼이 대세가 된 시대에 텍스트 역시 숏폼 특성을 지닌 시를 찾는다는 것이 흥미롭다.
최근에는 책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청각, 후각 등 다양한 감각으로 소비하는 것도 특징이다. ‘인생 시(詩) 전화 이벤트’가 인기를 끈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정된 번호로 전화를 걸면 한 편의 시 낭독을 들을 수 있는 이벤트였는데, 수신자 부담 전화이기 때문에 비용 부담도 없고 100편이 넘는 시 중 무작위로 들려주기 때문에 어떤 시가 흘러나올지 기대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벤트를 진행한 문학동네 출판사에 따르면 약 2주간 무려 29만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고 하니 그 정도로 소비자의 욕구를 저격한 셈이다.
또 하나 화제가 된 소식은 지난 6월 말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 5일 동안 15만 명이라는 인파가 몰렸다는 것이다. 특히 관람객 10명 중 7명은 2030세대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매년 독서인구 비율은 역대 최저치를 갱신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희한한 일이었다. 그 비결은 도서전이라고 해서 단순히 책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다채로운 경험이 준비돼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소개한 ‘시 전화’ 이벤트도 도서전의 한 코너로 시작됐으며, 이외에 향기를 고르면 그에 어울리는 책을 추천해주는 코너, 책의 좋은 글귀를 엽서 형태로 제작한 코너도 있었다.
텍스트를 ‘쓰는’ 것도 새로운 경험으로 각광받는다. ‘필사’와 ‘편지쓰기’가 새로운 감성 취미로 떠오른 것이다. 예전의 필사처럼 책 한 권을 통째로 필사하는 것이 아니라 명문장을 옮겨 적고 예쁘게 꾸미며 감성을 더하는 형식이다. 손글씨로 편지쓰기를 즐기기도 한다. 이에 따라 엽서나 편지지, 관련 문구를 판매하는 편집숍도 인기가 많다. 서울 연희동에 있는 문구 편집숍 ‘글월’에서는 직접 펜팔 서비스를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익명의 누군가에게 편지를 받을 수도 있고, 편지 주인이 연락처를 남겨놓았다면 가게를 통해 답장을 전할 수도 있다고 한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심지어 모두가 AI에 주목하는 시대에 왜 종이책이 주목받게 된 것일까? 역설적이지만 기술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힙하다’는 것은 항상 희소성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손글씨가 귀해지다 보니 아름다운 손글씨는 그 자체로 캘리그래피라는 소비의 대상이 됐다. 반대로 모두가 글씨체를 연습했던 시절에는 컴퓨터가 찍어낸 규격화된 글씨를 가독성이 높다고 선호했다. 독서 역시 마찬가지다. 영상의 시대가 되며 문해력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독서라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취미가 되고 있다. 한마디로 ‘있어빌리티(있어보이는+ability)’의 하나가 된 것이다. 인플루언서의 영향도 크다. 요즘 소비자들은 단순히 인플루언서의 외모나 멋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 생각, 라이프스타일을 추종한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돌 혹은 인플루언서가 읽고 있는 책이 ‘서울대 필독서’보다 호기심을 자극한다.
무엇보다 텍스트라는 매체로부터 느끼는 편안함이 큰 이유일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도파민 중독에서 자유롭지 못한 시대다. 밀도 높고 가벼운 자극 속에서 텍스트는 ‘힐링’의 상징이 되고 있다. 시 이벤트에 참여한 소비자들은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힐링’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는 책 중에서도 교양·전문서적이 아니라 문학을 중심으로 소비되는 이유와도 관련이 깊다.
현시대가 과도한 자극에 고통받고 있다는 것은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로 종이책이 인기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영국에서는 6억6900만 권의 종이책이 판매됐는데, 이는 사상 최고 기록이라고 한다. 특히 Z세대의 종이책 선호가 두드러졌다. 이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는 2022~2023년 도서관을 방문한 Z세대 숫자가 71% 증가했다고 한다. 독서 때문만이 아니라 조용하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찾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이책의 시대가 돌아오는 것인지, 젊은 독서인구가 앞으로 늘어날지 궁금해진다. 혹자는 지금의 텍스트 소비가 ‘보여주기식 유행’에 지나지 않으며 출판시장의 양적·질적 성장과는 관련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실제로 해외와 달리 국내에서는 종이책 시장에 눈에 띄는 변화는 없는 듯하다. 그럼에도 텍스트가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분명히 긍정적이다.
소비하는 방식에는 변화가 있더라도 오랫동안 인류의 생각을 담아온 글이라는 매체가 지속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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