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춘생과 조순옥, 박영준과 신순호는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어나 조국독립을 위한 항일운동의 뜻을 함께했던 한국광복군 부부다.
안춘생은(1912년) 안중근의 사촌 형인 안장근의 차남으로, 1920년대 일본군에 의한 한인 탄압을 목격하고, 항일 의지를 불태웠다. 중일전쟁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대비해 군사조직 창설을 추진하면서 1939년 안춘생을 시안으로 파견했다. 그는 중국군 포로가 된 한인들을 석방시켜 한국광복군에 합류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한 1942년부터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을 맡아 한인 병사 모집에 힘쓰고 미국과 공조해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했다.
조순옥(1923년)은 독립운동가 부부인 조시원, 이순승의 딸로, 아버지가 임시정부의 중심 정당인 한국독립당의 주요 인물로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광복군에 입대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하던 조순옥은 아버지 조시원과 함께 최전방 시안으로 이동해 총무처에서 활동하다가 안춘생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됐다. 조순옥 역시 남편 안춘생과 함께 1942년부터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원으로 활약했다.
박영준(1915년)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박찬익의 아들로, 대중 외교를 책임지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의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생활해야 했다. 1938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해 항일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부터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으로 활약했다. 광복 이후 주화대표단에서 활동하며 중국과의 외교는 물론 중국에 있는 한인들의 안전과 보호를 담당하는 역할을 이어갔다.
신순호(1922년)는 독립운동가 부부인 신건식과 오건해의 딸로, 17세가 되던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한국광복군 창설 후 총사령부에서 근무했다. 임시정부에서는 회계부에 근무하며 임시정부 대가족의 안살림을 도맡아 챙겼다. 1940년 일본군의 폭격으로 다친 아버지의 친구 박찬익을 만나면서 그의 아들 박영준과 연인으로 발전,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됐다.
정부는 네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안춘생, 박영준 선생에게는 각각 1963년과 1977년 독립장을 수여했다. 조순옥, 신순호 선생에게는 1990년 애국장을 각각 추서 및 수여했다.
9월의 6·25전쟁 영웅 최병익 육군중위 쏟아지는 폭격에도 “소대장이 왔다” 갑종간부후보생 19기 거쳐 육군소위 임관…소양강 상류 최전선서 활약 악전고투 속 전사…소대장 투혼에 감복한 소대원들 705고지 방어 성공
최병익 육군중위
‘2024년 9월의 6·25전쟁 영웅’으로는 6·25전쟁 당시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705고지에서 살신성인의 자세로 적의 공격을 막아낸 최병익 대한민국 육군중위(당시 소위)를 선정했다.
최병익 중위는 1930년 10월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1952년 5월 24일 갑종간부후보생 제19기를 거쳐 육군소위로 임관한 뒤 ‘미네소타(Minnesota)선’이라 불리던 소양강 상류의 최전선을 방어하는 국군 제8사단 제10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1952년 전반기 이후 전선은 한동안 교착 상태였다. 국군 제8사단은 소규모 수색 정찰을 통해 북한군이 9월 중순 이후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의 854고지와 812고지 일대에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방어선 강화에 나섰다. 그런데 동부전선을 총괄하는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8사단에 9월 24일까지 미 제45사단과의 임무 교대를 명령, 9월 22일 854고지를 맡고 있던 제10연대 제3대대부터 진지를 교대할 예정이었다.
1952년 9월 21일 오후 6시께 북한군은 854고지와 812고지를 향해 3시간에 걸친 포격을 가했다.
9시부터는 2개 대대가 812고지를, 10시40분에는 1개 연대가 854고지를 공격하면서 약 5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854고지에서 우측으로 1㎞ 떨어진 705고지에는 제3중대가 주둔했다. 그중 최병익 중위가 이끄는 제3소대는 854고지와 705고지 사이의 계곡을 바라보는 곳을 맡았다. 전투가 시작되자 북한군 2개 중대가 몰려오면서 중과부적(衆寡不敵)에 몰린 최병익 중위와 소대원들은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밤 12시께 북한군의 공격으로 제2분대가 위기에 직면하자 최병익 중위는 소대원 3명을 이끌고 제2분대 진지로 달려가 “소대장이 여기 왔다”고 외치며 소대원들을 독려하며 싸웠다.
사투가 벌어지던 중 적이 진지 우측을 침투했고, 최병익 중위는 적이 던진 수류탄에 전사했다. 소대장의 죽음을 목격한 소대원들은 “소대장님의 원수를 갚자! 소대장님 뒤를 따르자!”고 외치며 투혼을 발휘했고, 북한군을 705고지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정부는 고인의 공을 기리기 위해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1952년)을 추서했다. 2010년 갑종장교전우회는 육군보병학교 동춘관에 최병익 중위를 비롯한 갑종장교 출신 전쟁영웅 9위의 흉상과 소개비를 세운 뒤 2020년 10월 교내 호국공원으로 이전했다.
안춘생과 조순옥, 박영준과 신순호는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어나 조국독립을 위한 항일운동의 뜻을 함께했던 한국광복군 부부다.
안춘생은(1912년) 안중근의 사촌 형인 안장근의 차남으로, 1920년대 일본군에 의한 한인 탄압을 목격하고, 항일 의지를 불태웠다. 중일전쟁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대비해 군사조직 창설을 추진하면서 1939년 안춘생을 시안으로 파견했다. 그는 중국군 포로가 된 한인들을 석방시켜 한국광복군에 합류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한 1942년부터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을 맡아 한인 병사 모집에 힘쓰고 미국과 공조해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했다.
조순옥(1923년)은 독립운동가 부부인 조시원, 이순승의 딸로, 아버지가 임시정부의 중심 정당인 한국독립당의 주요 인물로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광복군에 입대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하던 조순옥은 아버지 조시원과 함께 최전방 시안으로 이동해 총무처에서 활동하다가 안춘생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됐다. 조순옥 역시 남편 안춘생과 함께 1942년부터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원으로 활약했다.
박영준(1915년)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박찬익의 아들로, 대중 외교를 책임지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의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생활해야 했다. 1938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해 항일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부터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으로 활약했다. 광복 이후 주화대표단에서 활동하며 중국과의 외교는 물론 중국에 있는 한인들의 안전과 보호를 담당하는 역할을 이어갔다.
신순호(1922년)는 독립운동가 부부인 신건식과 오건해의 딸로, 17세가 되던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한국광복군 창설 후 총사령부에서 근무했다. 임시정부에서는 회계부에 근무하며 임시정부 대가족의 안살림을 도맡아 챙겼다. 1940년 일본군의 폭격으로 다친 아버지의 친구 박찬익을 만나면서 그의 아들 박영준과 연인으로 발전,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됐다.
정부는 네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안춘생, 박영준 선생에게는 각각 1963년과 1977년 독립장을 수여했다. 조순옥, 신순호 선생에게는 1990년 애국장을 각각 추서 및 수여했다.
9월의 6·25전쟁 영웅 최병익 육군중위 쏟아지는 폭격에도 “소대장이 왔다” 갑종간부후보생 19기 거쳐 육군소위 임관…소양강 상류 최전선서 활약 악전고투 속 전사…소대장 투혼에 감복한 소대원들 705고지 방어 성공
최병익 육군중위
‘2024년 9월의 6·25전쟁 영웅’으로는 6·25전쟁 당시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705고지에서 살신성인의 자세로 적의 공격을 막아낸 최병익 대한민국 육군중위(당시 소위)를 선정했다.
최병익 중위는 1930년 10월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1952년 5월 24일 갑종간부후보생 제19기를 거쳐 육군소위로 임관한 뒤 ‘미네소타(Minnesota)선’이라 불리던 소양강 상류의 최전선을 방어하는 국군 제8사단 제10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1952년 전반기 이후 전선은 한동안 교착 상태였다. 국군 제8사단은 소규모 수색 정찰을 통해 북한군이 9월 중순 이후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의 854고지와 812고지 일대에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방어선 강화에 나섰다. 그런데 동부전선을 총괄하는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8사단에 9월 24일까지 미 제45사단과의 임무 교대를 명령, 9월 22일 854고지를 맡고 있던 제10연대 제3대대부터 진지를 교대할 예정이었다.
1952년 9월 21일 오후 6시께 북한군은 854고지와 812고지를 향해 3시간에 걸친 포격을 가했다.
9시부터는 2개 대대가 812고지를, 10시40분에는 1개 연대가 854고지를 공격하면서 약 5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854고지에서 우측으로 1㎞ 떨어진 705고지에는 제3중대가 주둔했다. 그중 최병익 중위가 이끄는 제3소대는 854고지와 705고지 사이의 계곡을 바라보는 곳을 맡았다. 전투가 시작되자 북한군 2개 중대가 몰려오면서 중과부적(衆寡不敵)에 몰린 최병익 중위와 소대원들은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밤 12시께 북한군의 공격으로 제2분대가 위기에 직면하자 최병익 중위는 소대원 3명을 이끌고 제2분대 진지로 달려가 “소대장이 여기 왔다”고 외치며 소대원들을 독려하며 싸웠다.
사투가 벌어지던 중 적이 진지 우측을 침투했고, 최병익 중위는 적이 던진 수류탄에 전사했다. 소대장의 죽음을 목격한 소대원들은 “소대장님의 원수를 갚자! 소대장님 뒤를 따르자!”고 외치며 투혼을 발휘했고, 북한군을 705고지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정부는 고인의 공을 기리기 위해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1952년)을 추서했다. 2010년 갑종장교전우회는 육군보병학교 동춘관에 최병익 중위를 비롯한 갑종장교 출신 전쟁영웅 9위의 흉상과 소개비를 세운 뒤 2020년 10월 교내 호국공원으로 이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