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파리올림픽이 지난 11일(현지시간) 폐막식을 끝으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우리나라는 21개 종목에 모두 144명의 선수가 출전해 메달 32개를 획득했다. 1984년 올림픽 이후 가장 적은 인원으로 출전해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둔 쾌거다.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여느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이 종료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병역특례 이슈가 불거지고 있다. 예컨대 탁구 국가대표 임종훈은 신유빈과 혼합복식 동메달을 따내 입대를 3주 앞두고 극적으로 병역특례를 받았다. 이로 인해 ‘삐약이’ 신유빈에게 ‘합법적 병역 브로커’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병역법 제2조는 병역특례 대상이 되는 ‘예술·체육요원’의 기준을 ‘문화 창달’과 ‘국위 선양’에 두고 있다. 현행 병역법에 따르면 올림픽에서 동메달 이상,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 체육요원으로 보충역에 편입된다. 보충역에 편입되면 기초군사훈련과 544시간의 봉사활동만으로 병역의무를 마치는 것이기에 메달은 곧 병역면제로 여겨진다.
병역특례제도의 역사는 길다. 비단 예술·체육요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유형의 병역특례제도가 시대 상황과 정치적 요구에 따라 변화돼 왔다.
병역특례는 징병제의 구조적 특성에 그 뿌리가 있다. 입대할 병역자원이 현역의 필요 인원을 초과하면 입대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대체복무를 확대하고, 입대할 자원이 적으면 대체복무를 축소하거나 혹은 현역의 적격요건을 낮춰 현역 판정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병역자원의 수급을 조절한다. 대표적인 게 1969년 신설됐던 방위병 제도다. 당시에 병역자원은 현역을 채우고도 연간 20만 명을 상회해 방위병 등 대체복무의 확대가 불가피했다.
대체복무의 하나인 지금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병역특례제도가 생겨난 것은 1973년의 일이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전문연구요원, 산업기능요원, 공중보건의사, 예술·체육요원과 같은 유형의 대체복무다. 요컨대 당시의 대체복무제도는 누군가에게 ‘특혜’를 주기보다 모두가 일정한 형태의 병역의무를 담당하도록 하는 데 방점이 있었다.
1973년 제정된 ‘병역의무의 특례 규제에 관한 법률’은 그 이전 해인 1972년의 뮌헨올림픽과 깊은 관련이 있다. 뮌헨올림픽은 북한이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다. 이 시절 국가의 지상 목표 중 하나는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었다(『대한체육회 90년사』). 그런데 여기서 대한민국이 참패했다. 북한은 첫 출전에서 종합 22위를 기록한 반면 우리는 33위에 머물렀다. 이후 태릉선수촌을 중심으로 소수정예 체육엘리트를 대상으로 국가 차원에서 선수를 육성하는 데 주력했다. 메달을 딴 선수에게 병역특례가 주어졌고, 국민체육진흥재단이 설립되는 한편 1975년엔 체육인 연금제도도 도입됐다. ‘88 서울올림픽’ 개최지 선정이 1981년 결정된 후에는 가히 스포츠공화국이라 할 정도로 ‘스포츠 총력전’에 매진했다.
병역특례제도가 만들어졌던 50여 년 전의 상황은 지금과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상황과 시대정신이 바뀌었다. 인구절벽으로 병역자원이 부족해졌을 뿐만 아니라 병역특례 잣대도 국위 선양이 아닌 형평성과 공정성을 중심으로 인식이 변화했다. 대부분의 종목은 이미 프로화돼 있어 경제적 수익을 포함해 개인적 성취와 보람의 성격도 짙어졌다.
2022년 연말 기준으로 사회복무요원, 전문연구요원, 산업기능요원 등 대체복무자는 모두 3만8000명이 넘는다. 이 중 보충역으로 편입돼 복무 중인 예술·체육요원은 95명이다. 인원은 적지만 병역의 형평성과 공정성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에 간단치 않다. 차제에 병역특례가 더 이상 혜택이나 포상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선수들의 전성기 기량을 꺾지 않으면서 형평성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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