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그들이 온다 - 체포된 스파이는 전쟁 포로
이달 초 미-러 대규모 수감자 교환
종신형 살인자vs미 유력 매체 언론인
바이든, 정치적 모험 걸고 협상 추진
각국 수감된 스파이 구출작전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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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이후 최대의 수감자 교환
지난 8월 1일 튀르키예 앙카라공항에 7대의 비행기가 착륙했다. 미국, 독일, 폴란드, 슬로베니아, 노르웨이 감옥에 수감돼 있던 러시아 스파이 6명과 미국에 수감됐던 러시아 해커 2명 등 8명이 러시아 측에 인도됐다. 러시아에 스파이 혐의로 수감돼 있던 서방 인사 7명과 러시아의 우방인 벨라루스에 수감된 1명, 러시아 내 반체제 인사 8명을 포함한 16명이 서방 측에 인도됐다. 교환된 24명은 비행기를 갈아타고 각국으로 향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오랫동안 교섭 끝에 냉전 이후 최대 규모의 가장 복잡한 수감자 교환을 마무리했다. 각국 언론이 수감자 교환(Prisoner Swap)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스파이 교환(Spy Swap)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대선을 3개월 앞둔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수감된 미국인을 귀국시키고, 러시아 반체제 인사들을 구해 낸 정치적 성과로 볼 수 있겠지만, 소련 정보기관 KGB 요원 출신인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해외에서 조국을 위해 충성스럽게 헌신해 온 스파이를 구출한 정보전 성과로 인식할 것이다. 미국이 데려온 수감자 중 대표적인 인물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 중 하나인 월스트리트저널의 러시아 담당기자 이반 게르시코비치로, 2023년 3월 취재차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를 여행하다가 중요 무기 공장에 관한 비밀정보를 수집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 16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이번 협상을 위한 카드로 혐의가 조작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밖에 스파이 혐의를 받은 언론인과 일반인도 모두 혐의가 불확실하다. 반면 러시아가 구출(?)한 대표적 인물인 바딤 크라시코프는 2019년 대낮에 독일 베를린 시내 한복판의 티어가르텐공원에서 전 체첸 반군 지휘관 캉고슈빌리를 사살한 인물로 독일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도 배후를 자백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국내 정보기관인 FSB 요원으로 알려졌으며, 푸틴이 “애국적 행동”을 했다고 칭송한 인물이다. 2022년 12월 슬로베니아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가 이번에 석방된 아르템 둘체프 부부도 러시아 해외 정보기관 SVR 소속으로, 아르헨티나 국적으로 위장해 스파이 활동을 해왔다. 10대인 두 자녀도 자신들이 러시아 사람인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고 한다.
스페인 국적으로 폴란드에서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체포된 러시아 군사정보기관 GRU요원 파벨 루프초프, 노르웨이에서 연구원으로 위장해 활동하다가 체포된 FSB요원 미하일 미쿠신 등도 모두 스파이다. 푸틴은 레드카펫이 깔린 모스크바공항 활주로에서 “조국에 복귀한 것을 환영한다”며 석방자들을 포옹으로 맞이했다. 러시아 국영TV는 프라임타임 톱뉴스로 “정보요원은 자신들의 인생을 바쳐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희생을 감수한다”며 치켜세우기도 했다.
스파이 구출을 위한 인질 외교
이번 수감자 교환은 미국 CIA, 독일 BND, 러시아 FSB 등 정보기관이 주도했다. 스파이 교환을 외교가 아니라 정보활동의 일환으로 인식하는 푸틴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석방한 미국인은 게르시코비치와 2023년 10월 러시아를 방문했다가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허위 정보를 유포한 혐의로 6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은 자유유럽방송 편집자 알수 쿠르마셰바, 2018년 12월 친구 결혼식 참석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가 군사기밀이 담긴 저장매체를 넘겨받은 혐의로 체포돼 16년형을 선고받은 전직 해병대원 폴 웰런 등 3명으로, 모두 석연찮게 스파이 혐의를 받았다. 독일 국적자는 5명으로 패트릭 쇼벨은 올해 초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에서 대마초 성분이 들어간 젤리를 소지한 혐의로 체포됐다. 러시아와 독일 이중국적 변호사 게르만 모이즈는 러시아인의 유럽 이주를 돕다가 지난 5월 반역 혐의로 수감됐다. 이들의 체포는 러시아가 임박한 수감자 교환에서 독일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러시아의 우방인 벨라루스도 지난 6월 간첩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독일인 리코 크리거를 석방했다. 독일 국적자가 많은 것은 푸틴이 가장 데려오고 싶었던 크라시코프가 독일에 수감돼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은 협상 과정에서 러시아가 가장 원하는 것이 크라시코프라는 것을 알게 돼 독일과 협의했다. 독일은 전 국민에게 각인된 중요한 살인자를 석방하는 것의 정치적 부담과, 석방 시 러시아가 앞으로도 스파이 석방을 위해 인질을 활용할 것이라는 우려를 제시하며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 올라프 숄츠 총리를 설득해 교환이 성사됐다. 독일이 동의한 것은 푸틴의 최대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석방될 것을 기대했기 때문으로, 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대신 그의 동료를 포함시켰다고 한다. 8월 1일 백악관 발표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대담한 결정으로 수감자를 석방해준 동맹국에 감사한다”면서 “특별히 숄츠 총리에게 큰 감사를 표한다”고 한 것도 그런 연유로 보인다. 역설적이지만 이번에 러시아에서 풀려난 수감자 중 가장 많은 것은 러시아인들로 모두 8명인데, 이들은 나발니와 함께 일했거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판해 온 반체제 인사다.
정보활동은 범죄가 아니라 전쟁
국가 간 스파이 교환 사례는 수없이 많으나 잘 알려진 것은 냉전 시기인 1957년 미국에서 체포된 소련 정보요원 루돌프 아벨과 1960년 소련 상공에서 격추된 미국 극비 고공정찰기(U-2) 조종사 프랜시스 파워스의 교환이다. 1962년 2월 동독 지역과 미국령 서베를린 지역을 연결하는 글리니케 다리에서 이뤄졌으며, ‘스파이 브리지’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2010년 6월에는 미국에서 장기 암약하다 체포된 러시아 흑색 스파이 10명이 4명의 러시아인과 교환됐다. 러시아 스파이 중에는 미녀 스파이로 널리 알려진 안나 채프먼이 있었다. 러시아 측 석방자에는 영국 정보기관을 위해 이중스파이로 활동하다 체포된 러시아 군사정보기관 GRU 대령 세르게이 스크리팔이 포함돼 있었다.
적대국에 수감된 스파이들이 교환되는 것은 군인이 포로로 잡혀 있다가 교환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스파이는 국가 안보와 국익을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85년 미국에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조너선 폴라드의 석방을 위한 이스라엘 정부의 끈질긴 노력과 2020년 이스라엘 입국 시 전용기를 동원하고 총리가 공항 활주로에 나가 맞이한 것, 소련이 자국 스파이인 조르게와 킴 필비 등을 우표로 제작해 기념하는 것은 정보요원뿐 아니라 모든 국민과 협력자에게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정보활동의 가치를 중요시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1996년 9월 미국에서 한국을 위한 정보활동 혐의로 체포된 로버트 김을 당시 한국 정부가 외면한 것과 대조된다.
정보활동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강고하고, 어떤 경우라도 국가가 지원한다는 믿음이 확고할 때 정보요원의 사기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 일반인도 정보기관을 신뢰하고 협조할 것이다. 각국이 적국에 수감된 스파이를 귀환시키는 데 정성을 쏟아붓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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