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현대 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괴테가 씨 뿌리고 프리드리히·바그너가 꽃피우다

입력 2024. 08. 21   15:50
업데이트 2024. 08. 2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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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16. 19세기 전반기 사조 낭만주의(하) - 유럽인의 심금을 울리다! 

시·청각 사로잡아 인간 감정 북돋아
예술가들 규칙 뛰어넘어 창조 몰두
각자 행복 추구 ‘개인주의’로 이어져
미술, 곡선·대각선 중심… 형식 탈피
낭만주의 음악 시작은 ‘악성’ 베토벤

낭만주의 대표 화가인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1818). 출처=위키백과
낭만주의 대표 화가인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1818). 출처=위키백과



낭만주의로 향하는 문을 연 것은 문학 분야지만, 이를 활짝 꽃피운 것은 미술과 음악을 통해서였다. 우리의 시각과 청각을 사로잡아 감정을 북돋아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감정이란 심신의 자극을 통해 발동되는 특성을 갖고 있기에 대체로 일상성을 벗어난 파격이 요구된다. 낭만주의 시대에 예술가의 역할은 모방(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유행한 신고전주의 사조는 과거 그리스·로마 시대의 재현을 목표로 함)이 아니라 창조했다. 예술가는 확립된 규칙을 파괴하거나 초월하는 자였다. 흔히 예술가는 그가 발휘하는 탁월한 상상력과 직관력 덕분에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리 더 깊고 참다운 현실을 드러내는 예언자인 양 여겨졌다.

18세기 말경 낭만주의 발현의 모판 역할을 한 것은 문학 분야였다. 새로운 경향의 문인들은 엄격한 절제와 형식에 치우친 고전주의 문체를 거부하고 인간의 공통된 속성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새로운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은 누가 뭐래도 독일 문호 괴테(1749~1832)였다. 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 계몽주의가 추구한 낙관주의보다는 비관주의를, 『파우스트』를 통해서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 추구가 아니라 영혼과 사랑임을 드러냈다. 그의 지적 동료이던 실러(1759~1805)는 『빌헬름 텔』에서 민족적 영웅의 행위를 이상화하고 민족의 자유를 향한 투쟁을 한껏 찬양했다.

독일에 뒤이어 영국에서도 낭만주의 경향이 힘차게 피어올랐다. 선구자 격인 윌리엄 워즈워스와 새뮤얼 콜리지는 “더 깊숙이 배어든 장중한 감성, 그것의 거처는 저무는 햇살 속”이라는 시어(詩語)에서 엿볼 수 있듯이 자연을 향한 깊고 신비한 사랑을 유려한 순수시로 표현했다. 이러한 경향은 바이런·셸리·키츠로 대변되는 후속 세대 시인 ‘3인방’에 의해 절정에 이르렀다. 한편, 인기작가 토머스 칼라일은 괴테나 칸트와 같은 독일 지성인들의 저술 및 낭만주의를 접한 후 쓴 『의상(衣裳) 철학』이나 『영웅숭배론』 등의 작품을 통해 현상세계의 배후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정신세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문학이 불씨를 던진 낭만주의 운동은 곧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예술 분야로 확산돼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근본적으로 낭만주의는 감성을 중시했기에 인간의 시각과 청각에 호소하는 예술 분야가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했다. 미술의 경우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한 자크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에서 보이는 절제와 엄격한 형식에서 벗어나 낭만주의 화가들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채 다채로운 색깔로 인간의 격한 감정을 표현했다. 그림의 대상도 정적인 인물 위주가 아니라 자연경관, 신화 및 역사적 사건, 그리고 해당 사건의 극적인 장면 등이었다. 신고전주의가 수직과 수평의 양식이라면, 낭만주의는 구불거리는 곡선과 대각선의 양식이었다. 특히 낭만주의 화가들은 화면에 견고한 질서와 구조를 확립하는 대신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하고 왜곡을 가하는 표현도 망설이지 않았다. 단적으로 터너(영), 제리코(프), 들라크루아(프), 그리고 프리드리히(독) 등과 같은 낭만주의 화가들의 그림은 로고스(logos)보다 격렬한 움직임을 드러내는 파토스(pathos)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출처=위키백과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출처=위키백과



이 시기에 활동한 낭만주의 화가들 가운데 카스파르 프리드리히(1774~1840)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를 대표자로 꼽을 수 있다. 프리드리히는 인간과 자연은 서로 감응하는 존재이며, 이를 통해 인간 내면에 있는 신성함을 끄집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그는 자연을 ‘그리스도의 성서’라고 불렀고, 그 안에서 신의 형상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는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석양을 바라보는 두 남자’, 그리고 ‘까마귀들의 나무’ 등과 같은 풍경화를 통해 종교적인 경외심을 전달하고자 했다. 또 ‘바닷가의 수도승’에서 엿볼 수 있듯이 때로는 자연 앞에 선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대비를 통해 자연의 위대함을 표현했다. 이를 위해 자연을 인간 이성으로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인식한 계몽주의와 달리 낭만주의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묘사하려고 분투했다.

프랑스 낭만주의를 이끈 화가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으로 잘 알려진 들라크루아를 꼽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이 낭만주의에 어떻게 깃들었는지를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의 배경은 1830년 파리에서 일어난 ‘7월 혁명’이다. 봉기한 시민군은 진압 차 출동한 정부군 총칼을 빼앗아 든 채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기 위해 파리 시내로 몰려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림의 중앙에서 시민군을 이끄는 그림 속의 여인, 즉 가슴을 드러내고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든 이 여인은 신고전주의가 찬양하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세련되고 차가운 인상의 여신이 아니라 오히려 평범한 프랑스 처녀(‘마리안느’)에 가깝다. 왕당파 병사를 살해한 후 그의 총과 군복을 약탈한 시민군과 옷이 벗겨진 채 비참한 몰골로 민중의 발아래에서 짓밟히고 있는 병사의 모습에서 격렬한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회화와 더불어 낭만주의 시대에 유럽인의 가슴을 들뜨게 만든 또 다른 분야는 음악이었다. 계몽주의가 무시했던 게르만족의 찬란한 고대설화와 중세의 전설들을 소재로 삼아 독일인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는 작품이 주류를 이뤘다. 이러한 민족주의 성향을 대표한 음악가로 당시 ‘가극의 왕’에 준하는 영향력을 과시한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를 꼽을 수 있다. ‘탄호이저’ ‘니벨룽겐의 반지’, 그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그가 작곡한 오페라는 대부분 독일의 고대나 중세를 배경으로 한 모험적 전설을 핵심 모티브로 삼고 있었다.

사실상 이러한 낭만주의 음악의 길을 앞서서 예비한 인물은 바로 ‘악성(樂聖)’ 베토벤이었다. 그는 애초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작곡한 ‘영웅교향곡’(3번)을 그가 황제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해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아무튼 이 교향곡을 듣고 있노라면 그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다채로운 악기들의 향연에 마치 실제 눈앞에서 자신이 숭앙하는 영웅을 대면하고 있는 것 같은 생동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낭만주의 음악은 18세기에 활동한 바흐나 하이든의 음악에서 엿볼 수 있는 절제된 음색보다는 타악기나 관악기를 적극적으로 동원해 창조한 웅장한 사운드로 청중의 감성을 자극했다. 이를 위해 연주자 규모를 대폭 늘림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출현을 견인하기도 했다.

19세기 전반기를 풍미한 낭만주의가 이후 세대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개인주의’다. 18세기 동안 유럽인은 조화와 균형, 정적인 질서, 고정된 인습, 그리고 사회 속 각 계층에 어울리는 행동 원리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서양의 18세기는 ‘보편과 인위(人爲)의 시대’였다. 낭만주의자들은 이러한 장벽을 때려 부쉈다. 모든 개인이 사회적 규제에 속박되지 않으면서 각자의 감정을 표현하고, 행복을 추구하고, 그리고 세상 속에서 능력을 계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시대를 초월해 인간의 감정이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이것이 집단에 적용됐을 때, 이는 각 민족의 독특성과 자율, 즉 역사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로 발현했고, 곧 19세기 후반기의 주류 사조로 대두할 참이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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