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가혹한 실증으로 가혹한 현실을 피하라

입력 2024. 08. 16   16:49
업데이트 2024. 08. 18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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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두영 테크업 대표
허두영 테크업 대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어떻게 보면 첨단 기술로 만든 무기를 검증하는 무대다. 드론이 탱크와 군함을 공격하고, 로봇이 지뢰를 제거하며, 인공지능(AI)이 조준할 목표물을 확인해 준다. 뉴스를 보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첨단 기술만 득실거리는 전장처럼 보일 지경이다.

지금 여기서 잘 돌아가는 시스템이 나중에 저기서 제대로 작동할까? 첨단 기술을 활용한 신무기를 개발하는 연구원의 숙명적인 고민이다. 공격이나 방어에서 맡은 임무를 확실하게 수행해야 하는데 충분히 검증받지 못한 신무기는 필연적으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위험을 안기 마련이다. 안전한 후방에서 진행하는 어지간한 테스트로는 신무기의 약점을 찾아내기 어렵다. 남극을 정복한 해군 장교 출신 두 탐험가의 전략을 비교해 보자.

영국의 로버트 스콧은 당시 산업혁명을 이끌던 자국의 첨단 기술을 믿었다. 대량생산된 통조림은 작전할 때는 멋진 식량이었지만, 남극에 오자 얼어 버렸다. 연료를 담은 깡통도 얼어 터지면서 등유가 새는 바람에 곁에 있던 식량까지 먹을 수 없게 됐다. 당시 최고 기술을 자랑하던 버버리의 방한복도 마찬가지였다. 추위는 잘 막았지만 땀을 흡수하지 못해 젖은 속옷이 얼어 버렸다. 이동수단으로 끌고 온 모터썰매도 극한의 날씨에 금방 고장 나 일찌감치 버려야 했다.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은 가장 추운 곳에 사는 원주민의 경험을 따랐다. 액체 지방에 고기 조각과 채소를 넣고 굳힌 보존식품 페미컨(Pemmican)은 열량은 물론 영양소 균형까지 맞춘 데다 가볍고 운반하기 편했다. 순록 가죽으로 지은 방한복은 바깥의 냉기를 막으면서 땀을 잘 흡수하고 말릴 수 있었다. 이동수단으로 데려온 개도 땀을 잘 흘리지 않아 추위에 강해 열량이 높은 비상식량을 먹어 가며 임무를 마쳤다.

스콧은 남극 원정을 이론적·과학적으로 준비했다. 가져갈 품목을 고르고 골라 나름대로 꼼꼼하게 테스트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의 추위와 남극의 추위는 차원이 달랐다. 영하 30도가 넘는 극한의 환경은 그의 계획을 족족 비틀어 극단의 고통을 경험하게 했다. 애써 준비한 첨단 모터썰매는 차원이 다른 추위에 얼어붙어 고장 났고, 버버리 방한복은 주석으로 만든 잠금장치가 얼어 깨지는 바람에 냉기가 쉽게 스며들었다.

아문센은 철저하게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로 접근했다. 스콧은 ‘야만’이라 무시한 이누이트(에스키모)족에게서 식량 조달하는 법, 개 썰매 다루는 법, 방한복 만드는 법까지 온갖 용품과 비법을 베끼다시피 도입했다. 심지어 눈(snow)에 반사된 자외선으로 눈(eye)이 머는 설맹(雪盲·Snow Blindness) 방지 안경까지 배워 왔다. 그렇다고 기술을 전혀 무시한 건 아니다. 극지 야영은 버버리의 방한텐트가 최고라고 평가했다.

1971년 국방과학연구소(ADD) 병참물자개발실 한필순 박사는 주한미군 철수를 우려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방탄헬멧을 개발했다. 숱한 낙하실험에 이어 군용 트럭으로 깔아뭉개도 멀쩡한 방탄헬멧을 들고 자신만만하게 청와대에 들어간 한 박사는 기겁했다. 대형 해머로 힘껏 내리쳐 보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가혹한 실증을 요구한 것이다.

첨단 기술만 앞세우면 ‘스콧의 비극(Scott’s Tragedy)’에 빠지기 쉽다. 기술의 우수성을 과신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닥치는 조건이나 관습을 무시하다가 겪는 참사다.

바야흐로 K방산의 시대다. 드론, 로봇, AI 같은 신무기에서도 앞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첨단 기술만 믿고 전투에 투입할 순 없다. 방위산업은 가혹한 실증을 거쳐야 가혹한 현실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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