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안보정론과 통일정론

입력 2024. 08. 08   14:41
업데이트 2024. 08. 08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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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한국에는 ‘안보와 통일’ 관계에 혼란을 느끼는 젊은이가 적지 않다. 오늘날 ‘민주’가 사회주의자나 데모꾼 할 것 없이 누구나 외치는 용어가 됐듯이 ‘통일’도 그런 식이다. 어떤 통일이든 하기만 하면 된다는 통일 지상주의는 위험한 궤변을 키워 내는 묘판이자 온상으로 오용됐다. 여기서 “남북이 평화롭게 상생하면 평화통일이 촉진된다”는 ‘상생=통일’ 등식이 부화했고, 연장선에서 “군사력 강화는 긴장을 초래해 상생을 해치므로 결국 통일을 저해한다”는 궤변도 탄생했다. 좌성향 인사들은 자신이 조성한 이 혼란 속에서 친북이 곧 상생과 통일로 가는 길인 양 스스로를 ‘통일 역군’으로 부르고 강군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통일 수구’로 매도한다. 따라서 우리 장병들은 헌법적 정론에 입각해 ‘상생과 통일’ ‘안보와 상생’ ‘안보와 통일’ 등의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정론과 궤변을 구분하는 혜안을 갖춰야 한다.

헌법 제4조는 “자유민주적 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추구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내용적으로 ‘자유민주’여야 하고 방법론적으로는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명령이다. 즉 ‘자유민주주의’가 한국을 포함한 모든 자유세계 국가에 시·공간을 관통하는 핵심적·궁극적 가치이므로 ‘자유’를 희생하는 통일을 금지하고 있어 주체통일이나 연방제 통일은 당연히 위헌이다.

이런 헌법적 정론 위에서 본다면 ‘상생=통일’ 등식은 궤변이다. 한국은 대북정책을 통해 ‘평화로운 상생’을 추구해야 하지만, 북한은 ‘자본주의적 오염’을 꺼리기에 한국이 보낸 구호품이 북한에 들어가서는 ‘수령님의 하사품’으로 둔갑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북한 체제의 존엄성과 정통성을 강화해 주는 이런 방식의 상생을 ‘자유민주’ 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우기면 궤변이 되고 만다. 물론 군사충돌 예방과 평화로운 상생을 위해 이런 방법도 때에 따라선 마다하지 않아야 하지만, 상생을 위함이라고 해야 옳다.

‘군사력 강화=상생 저해’ 등식도 단기적으로는 일리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궤변이다. 대치하고 있는 두 나라 중 어느 한쪽의 안보 역량이 압도적이면 반드시 다른 쪽을 지배하려 들기 때문에 순수한 상생은 어렵다. 그것이 국제정치의 원리다. 북한은 공세적인 대남 목표를 지닌 공자(攻者)이고 한국은 북한의 도발을 경계해야 하는 방자(防者)이기에 북한의 압도적 안보 역량을 방치하면 남북은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관계, 즉 ‘우낭(牛狼)’ 관계로 전락하고 북한이 남북 관계를 지배하게 된다. 즉 북한이 한국의 우세한 안보 역량으로 인해 대남 도발로는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할 때 안정적인 상생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튼튼한 안보는 상생을 위한 기반”이 정론이다.

‘군사력 강화=통일 저해’ 등식도 궤변이다. 세계 역사에서 안보 약소국이 더 큰 안보 역량을 가진 나라를 자신의 체제로 흡수통일한 사례는 없다. 결국 이 부분에서도 “튼튼한 안보는 자유민주 평화통일의 밑거름”이 정론이다. 그것이 헌법적 정론에 입각한 안보·통일정론이다. 이런 정론들을 정립한 장병이라면 자신이 ‘상생과 통일의 역군’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또한 한국이 ‘상생’과 ‘통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아야 하는 상황에서 통일이란 우격다짐으로 잡아채는 대상이 아니라 치열하게, 그러나 조용하게 ‘대비’해야 하는 대상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헌법이 명령하는 통일이 아닌 ‘나쁜 통일’에 기여하는 사람들일수록 ‘통일’을 가장 큰 소리로 빈번하게 노래 부르고 다니는 현실도 눈에 들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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