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민의 연구소(연예를 구독하소)
기억 조작과 로맨틱 코미디의 만남 ‘나쁜 기억 지우개’
선택적 기억 삭제 수술받고 새 삶 시작한 ‘이군’
자아도취적 인격·첫사랑 혼선 등 부작용도
기억 삭제·변형·조작은 국내외서 오래된 소재
단순 기록 아닌 ‘정체성’ 규정하는 요소로 다뤄
현실 가능성 성큼…윤리적 문제 미리 규정해야
로맨틱 코미디로 부담 없지만 생각할 여지도
기억은 단순히 축적된 기록의 연상물이 아닌,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때로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현재의 삶을 괴롭힐 때가 있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의 주인공 조엘(짐 캐리)처럼 말이다. 조엘은 이별의 고통에 괴로워하다가 이를 잊고자 기억을 지우려 한다. 하지만 결국 그 기억들이 자신의 삶과 정체성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깨닫는다.
지난 2일 첫 방송을 한 MBN 금·토 드라마 ‘나쁜 기억 지우개’ 역시 이러한 스토리를 주요 축으로 삼는다. 어릴 적부터 쌓인 좋지 않은 기억을 삭제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주인공 이군(김재중)의 모습을 통해서다. 이군은 우연한 기회로 나쁜 기억을 지우는 뇌수술을 받고 새로운 삶과 마주한다. 자아도취적 사고와 첫사랑의 기억 혼선 등 일부 부작용도 함께한다. 이군의 가족과 주변인은 바뀐 이군이 좋으면서도 왠지 딴사람이 된 것 같아 당혹스럽다.
기억의 삭제, 변형 및 조작은 오래전부터 국내외 작품에서 꾸준히 다뤄진 소재다. ‘토탈 리콜’(1990)은 조작된 기억으로 혼란을 겪는 퀘이드(아널드 슈워제네거)를 등장시켜 기억 조작의 위험성과 윤리적 문제를 고찰하게 하는 공상과학(SF) 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메멘토’(2000) 역시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레너드 셸비(가이 피어스)가 자신의 기억 조각을 맞추면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며 이를 정체성 회복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국내 서스펜스 소설 『기억술사』(2022) 역시 특정 기억을 지우고 대체시키는 바로기억클리닉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러한 작품들은 인간의 기억이 자아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나쁜 기억 지우개’ 역시 이러한 바통을 이어받은 드라마다. 차이가 있다면 진지하고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 풀어내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안방극장 시청자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이 작품에 접근하고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주인공이 겪는 혼란과 부작용도 과장되고 코믹하게 그려져 또 다른 볼거리가 된다. 물론 이로 인해 자칫 기억의 중요성과 윤리적 문제의 과학적 논의가 희석될 수 있다는 점은 ‘나쁜 기억 지우개’가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나쁜 기억 지우개’ 초반부에 등장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경주연(진세연)의 실험쥐와 관련된 프레젠테이션은 아주 허황된 설정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신경과학 연구팀은 2014년 광유전학(Optogenetics)이란 유전자 조작기술을 이용해 쥐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의 기억을 기쁨과 편안함의 기억으로 바꿀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과학잡지 ‘네이처’에 게재한 바 있다. 2023년 KAIST 생명과학과 허원도 교수 연구팀도 뇌에서 기억 형성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밝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같은 정신질환의 새로운 치료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나쁜 기억 지우개’와 같은 일이 가까운 미래에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다만 아직까지 이런 기술이 상용화되지 않은 이유는 기술적 한계와 안전성 문제, 윤리적 논란 때문이다. 기억을 조작하는 기술은 단순히 과거의 고통을 지우는 것 이상의 복잡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기억은 인간의 정체성과 자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기억 조작은 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시도에는 깊이 있는 논의와 철저한 검증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제가 콘텐츠에서 반복 등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현대사회에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 정신건강 문제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욱 중요한 이슈로 떠올라서다. 대다수가 자신이 가진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며, 이런 욕망은 ‘나쁜 기억 지우개’와 같은 작품에 깊이 공감하게 만들었다. 자연히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이끌어 낼 실제 기억 조작의 가능성에 관한 관심도 한층 상향된 분위기다. 그런 면에서 ‘나쁜 기억 지우개’의 방영시점은 탁월했고, 시청자들에게는 기억의 본질과 조작이 불러올 폐해를 미리 생각해 볼 여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했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기억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우리의 존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고,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기억이 우리의 경험을 재구성해 현재의 행동과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영국 철학자 존 로크 역시 기억의 연속성이 자아를 유지하는 핵심 요소임을 강조했다. 이들의 철학적 고찰은 ‘나쁜 기억 지우개’가 던지는 질문들에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나쁜 기억 지우개’는 기억을 지우는 기술이 가져오는 편리성과 그 대가를 보여 줌으로써 기억의 중요성과 윤리적 문제를 탐구하도록 이끈다. 이렇게 점진적으로 피어난 논의는 언젠가 과학적으로 그것이 가능할 지점에 이르렀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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