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패션의 역사

신분·계급 벗고 유행을 걸치다

입력 2024. 07. 29   15:43
업데이트 2024. 07. 2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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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역사 - 한국의 패션 역사(상)

전통 한복에서 출발
삼국시대에서 조선 초까지
신분 따라 화려·간소한 형태 입어

개항 이후 서양식 의복 도입
19C 말 고종황제부터 양복 입기 시작
1938년 ‘한국패션의 어머니’ 최경자
함경남도 함흥에 첫 양재학원 설립
앙드레 김·이상봉 등 디자이너 배출
한복·양복 결합, 패션산업 발전에 공헌

 

1938년 함흥양재학원. 앞줄 왼쪽 넷째가 설립자인 최경자 이사장. 국제패션디자인직업전문학교 제공
1938년 함흥양재학원. 앞줄 왼쪽 넷째가 설립자인 최경자 이사장. 국제패션디자인직업전문학교 제공

 


한국 패션은 전통 한복에서 출발해 개화기를 거쳐 현대적인 글로벌 패션으로 발전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잘 유지하면서도 시대적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해 현대 패션의 성공을 이룬 것이 아닐까 한다.
삼국시대에서 조선 초까지는 신분과 계급에 따라 화려하거나 간소한 형태의 한복을 입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과 함께 서구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며 서양식 의복이 점차 도입됐다. 1884년 갑신의제 관복 간소화, 1894년 갑오의제 관복 개정, 1895년 단발령과 서구식 군복 채택 등의 의제개혁을 거치며 고종황제가 강제적으로 양복을 시범적으로 착용하고, 관직자는 짧은 머리 스타일에 서양식 복장을 했다. 1899년 외교관 복장의 양복화가 도입되고, 1902년 한흥양복점이 한국인에 의해 처음 설립됐다.

양장을 최초로 착용한 여성은 당시 국무국장 윤치호의 부인 ‘윤고려’라고 한다. 윤치호가 그녀에게 양장을 권해 입기 시작했다. 이 시기 여성 복장은 ‘깁슨걸스타일(Gibson girl Style)’로, 큰 퍼프 소매에 폭이 넓고 긴 스커트, 그리고 목에 리본을 달아 여성미를 돋보이게 한 스타일이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식 복장이 강요되기도 했다. 1910년대는 개화 의상 정착기로, 도시 남성은 양복 차림을 했고, 해외 유학 출신 여성은 짧은 치마의 양장을 즐겨 입었다. 1906년 우리나라 최초의 기성복점인 ‘정자옥’이 계절마다 서양의 유행을 담은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면서 유행을 선도했다. 이 시기 서울에만 30~40개의 양복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20년대는 속옷 개량과 더불어 양말과 고무신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남성은 양복에 스프링코트와 오버코트를 입고, 넥타이, 모자, 구두, 지팡이, 회중시계, 넥타이핀 등 액세서리를 갖췄다. 남학생의 교복은 여학생의 교복보다 10년 정도 빠르게 서구화됐다. 스탠드칼라에 앞 단추가 5개 달린 획일적인 형태였으며, 학교 배지와 이름표 정도의 상징물로 구별됐다. 1930년대에는 남성을 중심으로 서구의 풍성한 느낌의 볼드룩과 상하가 다른 세퍼레이트룩(콤비룩)이 유행했다. 여학교 교복 또한 흰색 블라우스에 남색 주름치마를 입는 등 서양화가 이뤄졌다. 1934년에는 ‘의복 감상회’라는 패션쇼가 열리기도 했다. 1920~1930년대는 조선일보, 중앙일보에서 최초로 종합여성지를 창간하며 본격적인 패션광고가 시작됐다.

한국 최초의 양재학원인 ‘함흥양재학원(국제복장학원 전신)’이 1938년 최경자에 의해 설립됐다. 우리 패션사에서는 이것을 한국 패션의 시작으로 기념하고 있다. 앙드레 김, 이상봉 등 국내 패션계를 이끈 디자이너를 배출하며 ‘한국패션의 어머니’로 불린 최경자는 1948년 서울에 ‘국제양재학원’을 개원하고, 1950년 대구에 ‘국제양장사’와 ‘최경자복식연구소’를 설립했다. 1954년 명동에서 ‘국제양재학원’을 운영하고, 1957년 단독 패션쇼를 열었다. 이후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 모임인 ‘대한복식연우회’ 바자회를 기획해 디자이너들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1961년 국제양재학원을 ‘국제복장학원’으로 개칭했고, 당해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KFDA) 회장이 됐다. 또 1963년 패션모델양성기관인 ‘국제차밍스쿨’을 설립하고, 1975년 와라실업주식회사를 통해 진 제품을 생산했다.


'보병부령 상복' 육군박물관 소장
'보병부령 상복' 육군박물관 소장

 

'군의부위 예복' 육군박물관 소장
'군의부위 예복' 육군박물관 소장



이 시기 그녀는 일본문화복장학원, 미국의 F.I.T와 교류하며 해외 패션교육 시스템을 국내에 도입하기도 했다. 1970년대 그녀는 한국섬유 및 디자이너 브랜드 제품의 수출 증진을 위해 KOTRA와 협력하며 협업 패션쇼에 참여했다. 또한 백화점 중심의 유통 구조 개편에 발맞춰 백화점 패션쇼에 진출하고, 이와 더불어 한국의 현대패션과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한 문화패션쇼에도 참가했다. 그녀는 ‘한국잡지문화상(1975)’ ‘대한민국산업훈장(1985)’ ‘제2회 모범여성 경영인상(1989)’ 등을 수상하는 등 제1세대 패션디자이너로서 한국패션산업과 패션교육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어 1940년 전후 복식은 바지저고리 위에 오버코트나 망토 등을 걸치기도 했고, 양복지로 만든 두루마기 칼라 부분에 벨벳, 털을 달기도 하는 등 한복과 양복을 결합했다.

한편 일본은 황국신민화 등 정책을 펼치며 우리나라 관리와 교원에게 일본식 국민복을 입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여성의 노동바지인 ‘몸빼바지’(일바지)를 우리나라 여성에게까지 보급하고 착용을 강요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과 6·25전쟁 이후 미군정 시기 미국 영향이 커지면서 군복을 염색하거나 탈색한 의류가 자연스럽게 유행했다. 한복 치마와 서양식 블라우스를 함께 입는 등 한복과 양장이 혼재된 스타일도 많이 보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패션잡지가 발간되고, 패션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패션쇼가 열리기 시작했다. 1955년 국내에서 공식 승인된 디자이너로는 노라노, 서수경, 김영애가 있으며, 그 중 ‘노라노(노명자)’는 미국, 프랑스 유학 출신으로, 1950년 명동에 ‘노라 노(NORA NOH)의 집’을 열고, 195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다.

그녀는 1959년 미스유니버스대회 의상상 수상, 1965년 하와이에서 한국인 최초로 해외패션쇼를 개최하며 브랜드 수출을 이뤄냈다. 그 외에 파리 프레타포르테 패션쇼 참가 등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했던 인물로 현존하는 디자이너다. 1960년대 여성은 허리선이 강조된 드레스, 스커트, 블라우스를 즐겨 입기 시작했으며 특히 1960년대 후반 미니스커트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67년 인기가수 윤복희가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유행이 된 미니스커트는 1968년 그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고, 1971년에는 무릎 위 30㎝까지 올라가는 마이크로 미니스커트가 등장해 ‘경범죄 처벌법’에 의해 단속 대상이 되기도 했다. 미니스커트는 우리나라 사회와 문화의 개혁을 주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니스커트를 통한 ‘다리 노출’은 표현의 자유와 당시 가부장제 사회규범에 도전하는 여성인권의 강력한 항의 도구가 됐다고 본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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