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가로막힌 ‘중종의 사랑’ 통과시킨 ‘좁은 문’

입력 2024. 07. 25   17:13
업데이트 2024. 07. 2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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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그때 그 곳 - 창경궁 통화문

정문인 선인문·홍화문보다 격 밀려 
죄인·왕실 친인척 등 드나들던 ‘샛문’
1983년 없어졌다가 소방 전용도로로
연산군 관련 친정 탓에 쫓겨난 신씨
남편에 대한 그리움 치마바위 전설로
38년 만의 ‘석별’, 중종실록에 기록

 

창경궁 통화문 자리. 지금은 소방 전용도로로 쓰인다. 필자 제공
창경궁 통화문 자리. 지금은 소방 전용도로로 쓰인다. 필자 제공



통화문은 창경궁의 동쪽 출입문으로 정문인 남쪽의 선인문이나 그 옆의 홍화문에 비해 용도나 권위에 있어 격이 밀렸다. 일종의 샛문이나 쪽문 역할이었다. 죄인을 압송할 때나 왕실 친인척이 사가에 문안 갈 때, 인편에 서한을 주고받을 때 주로 이용했다. 왕실이 오랜 병으로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피전할 때면 아랫사람들이 미리 창경궁으로 건너와 채비할 때도, 중들이 병구완 기도를 드리기 위해 출입할 때도 이 문을 통했다. 이처럼 통화문은 왕세자가 드나들던 선인문과 달리 낮은 품계가 사용하던 문이었다. 홍화문과 월근문 사이에 있었으나 1983년 창경궁 복원 수리 때 없어지고 지금은 소방전용문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창경궁 근무자들도 이 문이 존재했던 사실을 알지 못한다.

구보는 이 문을 통해 남몰래 궁으로 들어왔던 여인 한 명을 떠올린다. 왕비에 오른 지 7일 만에 폐위돼 ‘7일의 왕비’로 부른 단경왕후 신씨(1487~1558)다. 1544년 겨울이었다. 초로의 여인이 남몰래 이 문을 지나 병석의 임금 중종을 만났다. 한때 부부였던 두 사람이 그렇게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졌다. 38년 만이었다. 신씨는 13세에 12세이던 성종의 차남 진성대군과 혼인해 알콩달콩 살았다. 폭군 연산군을 쫓아낸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씨도 왕비에 올랐으나 고모 거창군부인 신씨가 연산군의 비였다가 폐위됐고,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으로서 좌의정직에 있었던 데다 신수근이 반정세력 동참 권유를 거부하다가 척살된 전력이 문제가 되면서 신씨는 7일 만에 폐위됐다. 반정세력은 자신들이 죽인 좌의정의 딸이 왕비로 있으면 언젠가는 복수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것이다.


인왕산 치마바위. 필자 제공
인왕산 치마바위. 필자 제공

 

정치적 이유가 야기한 생이별이었다. “조강지처인데 어찌하랴”며 호소했으나 반정세력의 등에 업힌 신세였던 중종으로서는 달리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신씨는 친정과 남편을 모두 잃어버렸다. 왕비는 어의동(사직동) 본가로 돌아갔다. 둘이서 나란히 나왔던 집으로 혼자 쓸쓸히 돌아간 것이다. 이후 부부는 다시 만나지 못하다가 중종의 임종에서야 겨우 재회했다. 죽음을 앞둔 왕이 몰래 전 부인을 부른 것이었다. 신씨는 한달음에 달려와 통화문을 거쳐 중종에게로 가 마지막 작별의 정을 나누었다. 비밀리에 이뤄진 그날의 사건을 실록은 누군가의 물음에 답변 같은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입내하는 궁인이 있어 통화문을 시간이 지나도록 열어놓았기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는데, 들으니 상이 임종 때에 폐비 신씨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들어온 것이라고 했습니다”(『중종실록』 39년 11월 15일).

아무리 왕명이고 목숨이 경각에 이른 왕의 마지막 소원이라 하나 폐비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일이 법도에 없어 문제 될 소지가 큰 까닭에 ‘궁인’이라 속이고 입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왕은 닷새 전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피전하면서 통화문을 열어둘 것을 지시했다(『중종실록』 39년 11월 10일). 당시 창경궁은 많이 훼손돼 행궁과 다름없을 정도로 군색했다. 구보는 이 결정을 내릴 때부터 중종은 재회를 계획했던 것으로 짐작한다. 구보는 근 40년 만에 그리운 임을 만나기 위해 요동질 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통화문을 들어섰을 신씨의 흥분과, 생명이 꺼져가는 임을 잠깐 만나고선 슬픔을 잔뜩 안은 채 다시 통화문을 나왔을 신씨의 비애를, 고루 헤아려 본다.

돌아 나오는 신씨의 머릿속에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듯싶다. 1506년 9월 2일 반정 거사 당일 새벽 주도 세력이 왕으로 옹립할 목적으로 집으로 들이닥치자 상황을 모르던 남편이 연산군의 군사들인 줄 알고 자결하려 하자 자신이 나서 ‘말머리가 안팎 중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고 결정해도 되니 우선 살펴보자’고 충고함으로써 죽이러 온 군사들이 아님을 인지(『연려실기술』)하고 함께 안도의 한숨을 쉬던 순간이 먼저 떠올랐을 것으로 구보는 짐작한다. 이어서 왕비가 된 지 7일 만인 9월 9일 강제로 내쫓겨 건춘문을 통해 경복궁을 나와 본가로 향하던 날의 기억과 명 황실 보고에는 자신이 왕비 책봉 전 이미 사망한 것으로 허위 대응하려 한 사실(『국조보감』 『선원보략』)도 다시금 설움으로 다가왔을 터였다. 자신이 폐출된 지 사흘 만에 새로 간택된 왕비 장경왕후 윤씨가 재위 8년 만에 숨지면서 자신의 복위가 논의됐다가 무산된 일도 가슴 아프게 떠올랐을 듯싶다(『중종실록』).

세월이 흘렀는데도 왕이 여전히 자신의 안위를 염려해 보초 서는 수직 군사를 4명에서 6명으로 늘린 조치에 감읍했던 기억 역시 소환됐을 터였다(『중종실록』 23년 1월 29일). 그렇게 단경왕후 신씨는 7년간의 결혼생활과 38년간의 이별을 회한하며 통화문을 나서 사직동으로 향했다. 신씨는 그 후로도 13년여를 더 살다가 71세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신씨의 뇌리에는 그날의 통화문이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됐을 성싶다고 구보는 생각한다. 사랑의 기쁨과 슬픔이 문을 경계로 안팎에 있었으니 능히 그러했을 터이다. 스무 살에 강제로 헤어져 예순이 다 돼 기적처럼 재회했으나 임은 어느덧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음을 목격했다. 허무감이 엄습했을까. 삶이 누추하다고 느끼진 않았을까. 한때 아내이자 왕비였음에도 샛문을 비밀리에 오고가야 했으니 구보로서는 그러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단경왕후의 지위는 230여 년 후인 1739년 영조 15년에 복원됐다. ‘폐비가 아니라 강제이혼이었다’는 유권해석에 따른 결정이었다. 참가자 538명 중 537명이 찬성했다. 영조는 상소 주청자 김태남을 비롯, 500명이 넘는 의견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영조실록』 15년 3월 15일). 경기도 장흥 신씨의 묘는 온릉(溫陵)으로 격상됐다. 영조에 앞서 숙종도 복위를 시도했으나 ‘중종의 결정’이라는 반대의견에 부딪혀 접어야 했다. 대신 사당을 짓게 했다. 원통해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구보는 백성들이 오래도록 신씨의 처지를 가슴 아프게 여겼음을 ‘치마바위’의 전설에서 확인한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야사는 비련의 러브스토리에 다름 아니다. 신씨가 집 뒤 인왕산에 올라 경복궁 쪽으로 향한 바위 위에 붉은 치마를 펼쳐 놓음으로써 자신을 그리워하는 임금의 마음에 부응했다는 스토리다. 사람들은 두 정인이 치마를 매개로 애틋하게 정을 나눌 수 있도록 이야기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 했음을 알게 한다. 그렇게 “달빛에 물든 역사는 신화가 된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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