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철기 이범석 다시알기

직접 양성한 최정예 ‘연성대’ 박격포·기관총 무장

입력 2024. 07. 23   15:40
업데이트 2024. 07. 2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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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이범석 다시알기 - 청산리 첫 전투서 日 야마다 토벌대 격파

1개 혼성여단급 토벌대 추격 정보 입수
매복 유리한 청산리 백운평으로 유인
독립군 사기저하 거짓정보로 적 혼선
일 좌우 종대 마적단 만나 합류 늦어져

철기 지휘 2제대, 유리한 지형에 포진
공격개시 명령에 모든 화기 불 뿜어
뒤늦게 도착 야마다 본대도 속수무책

 

당시 간도지역에 형성된 어랑촌 한인마을 전경. 1920년대 간도지역의 한인과 중국인 비율은 6 대 1 정도로 한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들 한인은 한인독립군에게 소중한 정보원이자 보급원이었고, 일제토벌군에게 허위정보를 흘릴 기회를 제공했다. 출처=위키피디아
당시 간도지역에 형성된 어랑촌 한인마을 전경. 1920년대 간도지역의 한인과 중국인 비율은 6 대 1 정도로 한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들 한인은 한인독립군에게 소중한 정보원이자 보급원이었고, 일제토벌군에게 허위정보를 흘릴 기회를 제공했다. 출처=위키피디아



10월 초 백두산 일대는 이미 첫눈이 내린 매서운 초겨울이었다. 백두산 동측, 1572고지 중봉산과 1684고지 베개봉 중심의 험악한 산악지역에서 전투는 벌어진다. 10월 19일 화룡현 북방 삼도구 묘령, 한인독립군 제단체 연합회의에서 더 이상 전투를 피할 수 없으며, 싸울 상황이 되면 싸우자는 의견이 채택됐다.

피할 수도 있었던 봉오동전투에 대한 반성이 반영된 것일까. 북로군정서는 적의 규모가 보병·기병·포병 등 약 1개 혼성여단급이라는 정보를 주민을 통해 입수했다. 북로군정서는 이들을 매복에 유리한 지형으로 유인하기로 하고, 전투지역으로 청산리계곡 깊숙한 백운평을 선택했다. 적절한 방책이다.


히가시 지대의 ‘망치와 모루’식 포위작전


10월 17일 야간, 히가시 지대장은 기관총을 가진 500~600여 명의 한인독립군이 청산리 부근 계곡에 멈춰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다음과 같은 작전명령을 내렸다.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2개 기동부대에 의한 전형적인 ‘망치와 모루’식 포위작전 계획이다.

1. 제73연대장 야마다 대좌가 지휘하는 야마다 토벌대는 지대의 조공으로 증강된 보병 5개 중대를 기간으로 해 우선 가능한 한 신속하게 일부 부대를 보내 한인독립군이 서남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퇴로를 차단하고, 주력은 한인독립군을 수색해 토벌하라.

2. 가노 대좌가 지휘하는 제27기병연대는 지대 주력으로 후차창구(後車廠溝), 전차창구(前車廠溝), 쑹린핑(昇平嶺) 방면에서 우회해 노령(老嶺) 방면 한인독립군 퇴로를 차단 격멸하라.

3. 보병 제74연대 2중대, 기관총 1소대, 야포병 1소대는 두도구에서 지대 예비대로 대기하라. (이하 생략)

명령 수령 즉시 조공인 야마다 토벌대장은 토벌대를 좌우 2개 종대로 편성한 뒤 보병 중심인 나카무라 대대(우종대)로 하여금 18일 두도구를 출발, 20일 청산리 부근에서 지대 주력과 합류하도록 했다. 그리고 기관총 1개 소대와 야포병 1개 중대, 기병으로 증강된 좌종대는 야마다가 직접 지휘해 18일 용정촌을 출발, 20일 청산리에 도착하기로 했다.

하지만 모든 작전계획은 첫 총성이 울리자마자 휴지 조각이 된다는 군사금언이 있다. 먼저 출발한 우종대 나카무라 대대는 이동 중 중국 마적단과의 교전으로 전진이 지체돼 21일 정오 무렵이 돼서야 전투지역에 도착한다. 시간계획이 꼬여 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뒤에 출발한 좌종대의 선두 야스카와 전위대가 우종대보다 먼저 오전 8시쯤 백운평까지 들어섰다. 야스카와는 경계에 그리 신경 쓰지 않은 듯했다. 북로군정서가 청산리계곡 입구 쑹린핑의 한인 이주민을 통해 흘린 “독립군이 사기를 상실하고 싸울 생각도 못 하고 있다”는 정보를 물은 것 같다.

 

 



철기의 첫 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다

10월 19일 오전 9시경, 북로군정서는 청산리계곡 끝단인 노령고개 마루에 도착했다. 이때 일본군이 추격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회피기동 작전 간에 북로군정서는 2개 제대로 편성했다. 김좌진 장군이 직접 지휘하는 1제대는 훈련 수준이 미흡한 보병대대 병력과 지원인원 중심으로 선두에서 길을 여는 부대였다. 철기가 지휘하는 2제대는 1제대의 후미에서 전투를 담당하는 강력한 전투부대로서, 연성대를 중심으로 박격포와 기관총이 추가됐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제1기 사관연성소 졸업식 후 150명을 선발, 사병무장시켜 현재의 태스크포스(TF) 성격인 ‘연성대’라는 강력한 조직을 만들었다. 철기가 직접 훈련시켜 양성한 북로군정서 최정예 부대다.

일제 ‘간도출병사 히가시 지대 초토행동’ 항에는 “북로군정서 사관생도대를 기간으로 하는 전투부대와의 전투…”라는 기술이 있다. 이는 북로군정서 주력이 연성대임을 말하는 일제 측 기록이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 무렵, 일제 토벌대가 근접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자마자 철기는 즉각 2제대가 전투에 유리한 지형을 점령하도록 했다. 김좌진 장군은 1제대를 이끌고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전투지역에서 이격된 후방에 포진했다.

이민화 중대를 우측에, 한근원 중대를 좌측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정면 우중대는 김훈이, 좌중대는 이교성이 지키고, 철기가 정면 중앙에서 직접 지휘하기로 했다.

2제대장 철기는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1. 배낭은 모두 벗어 진지 후방 예비대에 두고, 휴대품은 최소화할 것.

2. 진지에 진입할 때는 충분히 위장할 것.

3. 한 사람 앞에 200발의 탄약을 탄대에서 꺼내 손 가까이 위치시켜 탄환을 꺼내느라고 사격 속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할 것.

4. 사격 전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흡연, 담화를 금할 것. 경거망동해 적에게 발견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됨.

5. 사격 개시는 내 총성을 신호로 할 것. 그 이전에는 누구라도 마음대로 사격해선 안 됨.

천연의 밀림은 독립군에게 양호한 은폐와 엄폐의 이점을 제공해 적에게 불의의 타격을 주게 하는 최적의 환경이다. 철기의 공격개시 첫 사격에 이어 순식간에 2제대 모든 화기가 일제히 불을 뿜는다. 200여 정의 보총, 6정의 기관총, 2문의 박격포 등 철기가 지휘하는 2제대 전 화력이 일시에 적 머리 위에 집중된 것이다. 야스카와 전위대는 배속된 기병을 선두로 전진했으나 순식간에 지리멸렬해졌다. 잠시 후 급보를 받고 야마다 본대인 좌종대가 채 전투대형도 갖추지 못한 상태로 전투지역에 도착했다. 다시 이들과 철기부대 간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들도 덫에 걸린 먹이일 뿐이었다.

일제의 야마다 토벌대를 상대로 한 청산리 첫 전투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결판났다. 김좌진의 현지 주민을 활용한 적시적인 첩보 획득과 기만정보 활용 등 노련한 작전지휘와, 철기의 적시적인 진지편성, 정신교육, 위장을 포함한 기도비닉 등 현장 전투지휘가 어우러져 북로군정서는 첫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 하지만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움켜쥐는 이는 신념을 갖고 미리 준비한 자다. 애국애족의 군인정신으로 부지런히 리더십을 갈고닦은 철기가 바로 그러한 위인이었다.


필자 박남수는 현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장으로 육군사관학교장과 서경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저서 『군인 이범석을 말한다』를 통해 장군의 리더십과 군인정신을 알리고 있다.
필자 박남수는 현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장으로 육군사관학교장과 서경대학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저서 『군인 이범석을 말한다』를 통해 장군의 리더십과 군인정신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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