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길을 묻다

性, 品, 格 사람이 돼라

입력 2024. 07. 17   17:05
업데이트 2024. 07. 17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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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다 ⑮ 조훈현 국수 

 

바둑황제의 길
다섯 살에 입문, 아홉에 입단, 프로기사만 61년
1989년 중 녜웨이핑에 역전승…세계 중심에 우뚝
마흔아홉 나이 ‘최고령 우승’ 타이틀 획득

인고의 길
이틀에 한 번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시합
행여 컨디션 지장 될까 여행·산책도 못 해
강자는 강자대로 약자는 약자대로 모든 대국 힘들어

바둑 인생서 배운 길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더라
정말 중요한 건 최선 다해 내 길을 가는 것
‘군인정신’으로 나름의 즐거움 찾길


세계 최연소 입단, 한국 최초의 9단, 대국 세계 최다승(1953승), 대회 타이틀 세계 최다 획득(160회), 한국 바둑의 전설 조훈현 국수의 입지전적인 이력이다.
그는 1989년 한·중·일 최정상 기사들이 참가한 바둑대회(응씨배)에서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며 세계 바둑계의 판세를 바꿨다.
변방으로 평가받던 한국 바둑 위상을 높이고 ‘바둑황제’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이제 바둑은 예전 같지 않다.
시종일관 우승만 하던 그도 후배 기사들의 도전 앞에서 실패의 쓴맛을 봤다. 
세계 정상이라는 인생 최고의 정점을 찍고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왔던 61년 바둑 인생에서 그가 배운 건 무엇이었을까.
그는 ‘도(道)’라고 한다. 
“승부사가 되기 이전에 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며 자신 앞에 놓인 길을 걸어왔다.
“그 길이 탄탄대로가 아닐리자도, 부와 명예를 이룰 수 없을지라도 다른 사람 길을 탐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하고 뜨겁게 걸어간다면 모두 자신만의 도를 찾을 수 있다.”
그가 지금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여전히 바둑을 좋아할 수 있는 이유다.
글=송시연/사진=김병문 기자 

 

한국 최고의 승부사 조훈현 국수는 ‘반상 위의 우주’라 불리는 바둑에서 ‘사람됨’을 배웠다. ‘최고수가 되기 전에 사람이 돼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른 바둑 인생 61년, 그의 얼굴에서 지나온 인생이 엿보인다.
한국 최고의 승부사 조훈현 국수는 ‘반상 위의 우주’라 불리는 바둑에서 ‘사람됨’을 배웠다. ‘최고수가 되기 전에 사람이 돼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른 바둑 인생 61년, 그의 얼굴에서 지나온 인생이 엿보인다.

 


부와 명예 이룰 수 없을지라도 
다른 사람 길 탐내지 않고 묵묵히 걸어간다면
자신만의 도 찾을 수 있어

흑과 백을 넘어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정말 중요한 건 최선을 다하는 것


-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예전처럼 바쁘지는 않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공부하더라도 머릿속에 안 들어온다. 그냥 동네 한 바퀴 돌고, 뒷산도 갔다 오고. 그런 소소한 일상을 살고 있다.”


- 만 다섯 살에 바둑을 시작해 아홉 살에 입단하셨습니다. 프로기사만 61년. 최고 전성기 때는 어떠셨나요.

“이틀에 한 번꼴로 시합이었다. 대부분 시합이 아침 10시에 시작된다. 빨리 끝나야 오후 6~7시, 보통은 밤 10시다. 늦으면 자정을 넘긴다. 시합이 끝나고 나면 머릿속이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뿌옇다. 잠도 안 온다.”


그는 20대에 한국 바둑을 휩쓸었다. 스물아홉에 한국 최초로 9단에 올랐고, 마흔한 살이던 1994년 세계대회 2관왕에 올랐다. 마흔이 넘으면 노장 취급을 받는다는 바둑계에서 마흔아홉의 나이에 세계대회인 삼성화재배 우승을 이루며 ‘최고령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 그 많았던 대국 중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대부분 응씨배 결승 대국을 꼽지만, 사실 모든 대국이 힘들었다. 강자는 강자대로 약자는 약자대로 어려웠다. 세상에 어느 하나 쉬운 건 없었다.”


응씨배는 바둑 종주국인 중국이 만든 바둑올림픽이다. 그는 1989년 9월 5일 세계 바둑 최정상을 놓고 겨루는 응씨배 결승전에서 중국의 녜웨이핑과 맞붙었다. 녜웨이핑은 1980년대 후반 중일슈퍼대항전에서 일본의 초일류 기사들을 상대로 파죽의 11연승을 기록한 중국 최고의 기사였다. 사실상 응씨배도 녜웨이핑이 일본 콧대를 꺾기 위해 시작된 대회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가 이 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하며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이변을 만든 것이다. 5판3승으로 치러지는 결승에서 그는 첫 대국을 이겼다. 이후 두 판을 내준 뒤 다시 제4국을 이겨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결국 마지막 제5대국에서 극적인 역전극을 펼치며 그동안 변방으로 여겨졌던 한국 바둑을 세계 중심에 우뚝 세웠다.

 

한국 최고의 승부사 조훈현 국수는 ‘반상 위의 우주’라 불리는 바둑에서 ‘사람됨’을 배웠다. ‘최고수가 되기 전에 사람이 돼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른 바둑 인생 61년, 그의 얼굴에서 지나온 인생이 엿보인다.
한국 최고의 승부사 조훈현 국수는 ‘반상 위의 우주’라 불리는 바둑에서 ‘사람됨’을 배웠다. ‘최고수가 되기 전에 사람이 돼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른 바둑 인생 61년, 그의 얼굴에서 지나온 인생이 엿보인다.

 

 

- 난관에 봉착했을 때는 어떻게 헤쳐 나가셨는지.

“항상 전력 질주만 할 수는 없다. 질 때는 계속 진다. 감기만 걸려도 몸이 아파 체력이 떨어진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특히 경기에서 크게 지고 나면 트라우마가 생기기 십상이다. 탈출이 쉽지 않다. 그래서 나쁜 것은 빨리 잊는다. 진 것만 생각하면 끝이 없다. 한판을 하더라도 이겨 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지금 할 수 있는 경기에 진심을 다해 몰두했다. 한 번 이기고 두 번 이기면 사람이 기분이 좋아진다. 강자만 계속 만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약자라도 이기면 기분은 좋은 거다. 그렇다고 너무 이기기만 해도 안 된다. 자만하게 된다. 자만하면 아차 하는 순간 밑으로 떨어진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 나의 컨디션이 어떤지, 내가 요새 공부를 했는지, 문제를 찾고 해결해 나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 말 그대로 인고의 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기고 지고를 떠나 쉽지 않은 일이다. 바둑이고 인생이고 똑같다. 위로 올라가려면 보통의 노력으로는 안 된다. 적당히 해서 되는 일은 없다. 정신력과 체력을 모두 쏟아부어야 기록이 나오는 거다.”


- 이제는 바둑 위상이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한국 바둑의 전성기를 만든 입장에서 서글프진 않으신가요. 

“아쉽지만 인정하고 있다. 별수 없다. 지금도 마음은 앞서지만, 안 된다. 세월은 못 이긴다. 나름대로 수긍하면 된다. 지금에 만족하면 된다. 당시에는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못 했다. 행여나 컨디션에 지장이 될까 여행은 물론 집 앞을 산책하는 것도 쉽게 할 수 없었다. 한데 지금은 여행도 가고, 산책도 한다.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상황에 맞게, 지금 위치에 맞게 살면 된다. 과거의 영광에 취할 게 아니라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중요한 거다. 결국 내 선택이다.”


- ‘제1회 농심백산수배 세계바둑 시니어최강전’과 ‘제5회 월드바둑챔피언십’ 등 작년과 올해 시합을 치르셨어요. 승패에 대한 부담이나 걱정도 있었을 것 같은데. 

“예전에는 이기기 위해 바둑을 뒀는데, 이제 이기고 지고는 상관없다. 그저 좋아서 둔다. 보고 싶다는 분이 많으니까 둔다. 실제로 여유도 없어지고, 지는 일도 많다. 승부라는 게 그렇다. 지면 재미가 없다. 하지만 이제 이기고 지는 건 둘째 문제다. 그런 것들을 많이 내려놓았다. 멀리 떨어져서 보니 승패란 게 그리 중요하지 않더라. 정말 중요한 건 결과가 어떻든 최선을 다하면서 내 길을 가는 것이다.”

 

 

한국 최고의 승부사 조훈현 국수는 ‘반상 위의 우주’라 불리는 바둑에서 ‘사람됨’을 배웠다. ‘최고수가 되기 전에 사람이 돼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른 바둑 인생 61년, 그의 얼굴에서 지나온 인생이 엿보인다.
한국 최고의 승부사 조훈현 국수는 ‘반상 위의 우주’라 불리는 바둑에서 ‘사람됨’을 배웠다. ‘최고수가 되기 전에 사람이 돼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른 바둑 인생 61년, 그의 얼굴에서 지나온 인생이 엿보인다.



-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이 열린 지도 벌써 8년이 지났습니다. 최초의 인간과 AI의 대결이었는데,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바둑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놀이다.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같은 대국은 없었다. 경우의 수가 무한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AI가 세계 정상의 프로기사를 뛰어넘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국 한판에 그 생각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세돌이 나름 선전했지만 판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인간은 기계를 이길 수 없다. 그렇다고 인간이 기계를 이길 필요가 있을까. 그저 변화에 적응하면서 살 방법을 찾아내면 된다.”


- 바둑을 함에 있어, 인생을 살아옴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 신념은 무엇인가요.

“사람이 되는 것이다. 9년 동안 세고에 스승님과 함께 있으면서 배운 게 있다. 최고수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는 것이다. 스승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인성, 인품, 인격을 갖춰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일일이 가르치거나 강요하진 않으셨다. 그저 당신의 삶을 통해 하나하나 보여주셨다. 하나 갖추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셋 중 하나라도 갖췄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온다. 그래도 모든 걸 제대로 갖추기는 힘들다. 사람이 된다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세고에 겐사쿠는 ‘현대바둑 창시자’라 불리는 일본의 프로 바둑기사다. 그는 열한 살 때 일본 유학길에 올라 세고에의 제자로 들어갔다. 세고에와 9년을 함께 살며 바둑과 바둑을 대하는 자세, 사람으로서의 도리, 깊은 정신세계를 배웠다.


-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병사들에게 한 어른으로서 조언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3년하고 5일 군 생활을 했다. 좋은 기억도 있고 나쁜 기억도 있다. 어떤 것이든 아흔아홉 가지 안 좋은 게 있다 하더라도 한 가지 좋은 건 있다. 뭐든 100%는 없다. 군대는 ‘군인정신’이라는 게 그 한 가지다. 군 복무 중에도 시합에 나갔는데 선임이 “지고 오면 죽인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그때는 나도 순진했는지, 선임한테 혼나는 게 무서우니까 기를 쓰고 이겼다. 나름의 군인정신이다. 군인정신만 있으면 어려울 게 없다. 지금 군대에 있는 친구들은 많이 힘들 거다. ‘내가 왜 이곳에 억지로 끌려와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기왕 간 군대에서 군인정신이 무엇인지 배우고 나왔으면 한다.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건강할 때 아닌가. 그 안에서 나름의 즐거움을 찾아 건강하게 전역하면 된다. 얻어걸리는 건 없다.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인 태도로 지금 내게 주어진 길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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