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이범석 다시알기
강철 같은 의지와 천리마의 기상 - 아호 ‘철기’의 탄생
1915년 여운형 애국심에 감화 중국 망명 결행
상하이 도착 즉시 신규식 선생에 ‘재목감’ 인정
중국군관학교 윈난육군강무당 입교 ‘군인의 길’
혹독한 훈련과 갖은 난관 헤치고 리더십 함양
가까웠던 노복의 죽음…일본군 향한 분노 싹터
이범석은 1900년, 지금의 서울 명동 중국대사관 자리에서 조선조 세종대왕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범석의 집에는 노복이 많았다. 그중 정태규라는 힘이 장사인 노복과 범석은 혈연과 같은 정을 나눴다. 정태규는 대한제국군대 하사관으로 군대 해산 시 남대문전투에서 일제로부터 총상을 입고 범석의 집 앞에서 절명했다.
정태규의 죽음을 목도한 어린 범석은 슬픔보다 분노를 먼저 느꼈고, 이 사건이 자신의 일생을 결정하는 분기점이 됐다고 회상했다.
1912년, 범석은 강원도 이천(伊川)군수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이천보통학교 2학년으로 전학했다. 당시 경성에서 강원도를 거쳐 황해도, 함경도로 가는 길목이던 이천은 마지막 의병들의 항쟁이 치열했던 곳이다. 범석은 등하굣길에 일본군 토벌대가 의병들을 붙잡아 포승줄로 끌고 가는 장면을 종종 목격하곤 했다.
망한 나라를 되찾겠다는 대한제국 의병들이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처참한 광경을 1년에 4~5차례씩 목격하면서 범석의 항일정신은 깊어만 갔다.
경성제일고보 재학 시절 식민지 동화 교육에 방황
14세에 최우등 성적으로 이천보통학교를 졸업한 범석은 서울로 상경해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 갑반에 무시험 진학했다. 기쁨도 잠시, 고보 시절 범석은 일본인 교사들이 벌이는 노골적인 식민지 동화교육에 반발하고 분노하며 방황했다.
그러던 중 1915년 여름, 운명적으로 몽양 여운형을 만났다. 당시 열혈 독립운동가였던 몽양은, 중국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던 중 잠시 귀국해 독립운동에 참여할 청년학생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짧은 만남 동안 몽양은 범석에게 중국 망명에 대한 모험심과 애국심을 불어넣어 줬고, 범석은 중국 망명과 항일무장투쟁 결심을 굳힌다.
1915년 11월 어느 날 밤 11시30분, 범석은 남대문역에서 신의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어디까지 갈지, 어떻게 뜻을 펼칠 수 있을지 모른 채 범석은 모든 걸 운명에 맡기고 신의주를 향해 달리는 열차에서 몇만 리, 몇십 년 후로 꿈과 상상의 세계를 펼쳤다고 회상했다.
예관 신규식 선생과 운명적인 만남
상하이에 도착한 범석은 향후 행보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예관 신규식을 찾았다. 중국에 온 동포 청년 중 군인이 될 만한 재목을 물색하던 예관은 16세이지만 당찬 범석의 모습에 그를 군인으로 키울 것을 작정했다.
예관 곁에서 범석은 여러 독립운동 대선배를 만나고, 또 종종 예관과 쑨원 사이의 편지 심부름을 하면서 전반적 정세를 익혔다. 그리고 중국군관학교 입학에 필수인 중국어 공부와 체력 단련에 열중했다.
최초 군관학교 입교자 선발은 신규식 등 선배 독립지사들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엄격하게 이뤄졌다. 범석은 나이와 중국어 능력, 경력이 미달했으나 간곡한 입학 의지로 선배 독립지사들을 감동시켜 결국 선발됐다. 범석은 윈난육군강무당(후에 윈난육군군관학교로 개명) 12기로 입교했다. 일본 정부의 시비를 피해 연령이 다섯이나 위인 지린성 이국근이라는 사람의 호적을 사서 만 18세 이상 입학 기준을 통과했다.
겸손과 포용, 성실과 정직 갖춘 군인으로 성장
윈난육군강무당 교관들은 대부분 일본 육사와 프랑스 생시르사관학교 출신이었다. 아주 엄격한 교육 분위기여서 육지로 배를 끌라면 끄는 것이고, 못 끌면 끄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고 철기는 회상했다.
신병교육 기간 매일 아침 총검술 훈련을 하는데, 한 번은 범석이 일본 육사 출신 임진웅이라는 교관에게 자세 불량으로 다섯 번이나 찔림을 당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다. 자존심 강한 범석은 분노와 모멸감으로 언젠가 복수할 것을 결심했다. 신병교육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이를 악물고 열심히 수련하던 범석에게 복수의 기회가 왔다. 교관과의 대련시간. 교관이 허점을 보이는 틈을 타 범석이 의도적으로 힘차게 목을 찔렀는데 교관은 여유 있게 비켰고, 오히려 교관의 역습에 범석은 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날 훈련 종료 후 교관에게 별도로 불려 간 범석은 교관으로부터 울림 있는 지도를 받았다. “그동안 네가 열심히 훈련한 것을 칭찬하지만, 오늘같이 주제넘는 행동을 또 한다면 더 이상 장래 발전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범석은 겸손과 포용이라는 리더의 기본을 배운다.
병과를 선택할 때 범석은 평소 숭모한 ‘말을 탄 나폴레옹’을 연상하고 기병을 지원했다. 첫 학기에 240명 중 173등을 한 범석은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고 밤잠도 안 자고 각고의 노력을 했다. 그리고 졸업 때 범석은 기병과 수석, 전체 9등을 한다. 범석의 도전정신, 끈질긴 노력은 군인정신 형성의 기본이다.
기병과는 야외연습을 마치고 나면 일단 대연병장에 들러 마무리로 수명씩 나눠 횡대 돌격연습을 하곤 했다. 말이 최고 스피드를 내어 뛰는 습보돌격(분당 550~600m 이상 전속력)이다.
범석이 졸업하기 얼마 전 일이었다. 하루 종일 훈련으로 말안장이 땀으로 미끈미끈해진 상태였다. 범석은 교관이 보지 않는 틈을 타 미끄럽지 않게 안장 좌우에 수통의 물을 조금씩 쏟아부었는데 교관에게 발각되고 만다.
벌로 말고삐를 말 목에 걸고 말의 좌우 쪽 등좌를 다 벗겨 말 안장에 걸고, 팔은 뒷짐 지고 완전무장한 상태에서 사람을 말 위에 세우고 말 궁둥이를 채찍으로 쳐 달리게 했다. 힘이 다 빠진 상태에서 굴러떨어지고 다시 올라타기를 네 번이나 반복했다. 혼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기합이었다. 그날 교관의 훈시는 ‘성실과 정직은 군인의 생명’이라는 것이었다. 그 교훈이 평생 범석을 지배했다.
언어 장벽 속에 고된 학술훈련과 내무생활, 수면부족 등 난관을 극복한 범석은 군인으로 성장했다. 애국애족정신을 바탕으로 한 군인정신의 기본이 형성된 것이다. 졸업 시 범석은 체득한 군인정신과 리더십을 구현하겠다는 각오로 철기(鐵驥)라는 아호(雅號)를 짓는다. ‘강철 같은 의지와 천리마의 기상으로 항일무장투쟁할 것을 다짐’한다는 의미다. 이후 아호 ‘철기’는 그의 평생 좌우명이자 상징이 된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