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이승만 대통령과 반공포로 석방

입력 2024. 06. 28   14:35
업데이트 2024. 06. 3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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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6월 18일은 71년 전 6·25 정전협정을 앞두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했던 날이다. 남쪽에는 16만여 명의 공산군 포로가 수감돼 있었다. 그중 3만5000여 명은 정전 후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반공포로’였고, 이들은 거제도수용소에서 분리돼 부산·광주·논산·대구 등 7개 지역에 분산 수용됐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협의도 없이 기습적으로 강행된 반공포로 석방은 중공군의 제7차 공세를 촉발하고 정전협정 조인을 지연시켰지만, 전쟁 후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연 역사적 전기였다.

당시 휴전회담은 중공군의 제6차 공세가 무위로 끝난 직후인 1951년 7월 시작됐지만 경계선 확정, 포로 교환 등의 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다가 1952년 10월 중단되고 만다. 38도선을 군사경계선으로 해야 한다는 공산군 측 주장은 현 전선을 경계선으로 하자는 유엔군 측의 반대에 부딪히고, 포로 개인의 자유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유엔군의 제안과 무조건적인 강제송환을 요구하는 공산군의 입장이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해 11월 미국에서 정전협정 조기 성사를 공약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당선되고 1953년 3월 6·25전쟁의 배후 지령자로 정전에 반대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휴전회담은 활기를 되찾았다. 1953년 봄이 되면서 정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소식이 나돌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통일 없는 정전 반대’와 ‘북진통일’을 외치며 휴전회담에 불참했고, 누적된 전쟁 피로로 조속한 정전을 원했던 유엔군과 공산군은 그를 배제한 상태에서 실제 전선에 입각한 군사분계선에 합의하고 협정 서명을 서둘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기습적으로 반공포로 석방을 강행했고, 2만7000여 명의 포로가 탈출에 성공한다. 미국은 격노했고 펑더화이 중공군사령관은 휴전회담을 중단해 버린다. 미국이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고 그를 감금하는 ‘에버레디(Ever-ready) 작전’을 극비리에 수립했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펑더화이는 한국군의 기를 꺾어 놓겠다며 2군단이 지키던 중부전선의 금성지구를 향해 7월 13일부터 일주일간 제7차 공세를 펼친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 후 중공군의 완전철수 보장’ ‘협정 조인에 앞선 한미상호방위조약 서명’ ‘전후 한국의 경제 재건에 필요한 원조 제공 약속’ 등을 미국에 요구했다. 미국은 결국 이 요구를 수용하고, 정전 후 미군 주둔을 약속한다.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10월 1일엔 한미동맹 조약이 체결됐다. 이후 대한민국은 동맹이 제공하는 안보방패 아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정체성으로 하는 근대국가로 거듭나면서 경제 기적을 이뤘다.

돌이켜 보건대 71년 전 반공포로 석방은 정전협정을 지연시키고 귀향의 꿈에 부풀었던 수많은 젊은이에게 애석한 죽음을 강요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큰 그림에서 보면 한 줌밖에 안 되는 군사력을 보유한 극빈국의 지도자가 미래 혜안을 갖고 끈기와 정신력으로 강대국의 정책 변경을 끌어내 대한민국 미래를 열어 간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오늘날 많은 이가 이승만 대통령을 외교의 달인이자 국민을 번영으로 이끈 지도자로 기억하며, 그를 독재자로만 알고 있는 젊은이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지난달 19일 북·러가 사실상의 군사동맹 복원을 의미하는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맺은 뒤 국내에는 또다시 핵무장론이 분출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라면 이럴 때 어떤 결단을 내릴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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