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병영의창

6·25전쟁과 나, 그 의미

입력 2024. 06. 21   15:27
업데이트 2024. 06. 2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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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 육군대위 국방대학교 전략학부
김주현 육군대위 국방대학교 전략학부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어서 6·25전쟁과 관련된 특별정훈교육을 많이 한다. 필자도 야전에서 병사들 대상으로 관련 정훈교육을 한 경험이 있다. 비록 교안이 준비됐지만, 필자가 간접적으로 겪은 가족사를 통해 호국보훈의 의미를 되새기며 병사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가족과 전쟁, 그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의 부모님은 부산에서 나고 자라셨지만, 조부모님 중엔 친조모만 부산 태생이었다. 오늘은 두 조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먼저 친조부께선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5형제 중 넷째를 끌고 가는 슬픔을 겪으셨다. 친조부께서도 북한군에 잡혀갈 뻔했으나 극적으로 도주하셨고, 전선이 남진하는 가운데 부산으로 피란해 터를 잡으셨다. 증조부께서는 자식들이 끌려가던 상황에 충격을 받아 유명을 달리하셨고, 나머지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가 전쟁이 끝나고 친조부께서 자리 잡은 부산으로 모였다. 친조부는 전후 재건기에 초등교원 임용에 합격해 경남과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셨다.

외조부는 황해북도 사리원 출신이셨다. 전쟁 초기 조선인민군 학도병으로 징집돼 1952년 늦여름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에 포로로 붙잡혀 거제포로수용소에 수용되셨다. 1953년 반공포로 석방으로 수용소를 빠져나와 대구로 시집간 큰누이를 만나고자 하셨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이후 외조부는 대구역에서 모병관의 눈에 띄어 3년간 육군 헌병으로 병역을 마쳤고, 결혼해 부산으로 이사하셨다. 외조부는 어린 시절 배운 일본어를 활용해 일본에서 첨단 인쇄기술을 도입했고, 부산지역 내 백화점으로 납품하는 전단을 포함한 인쇄사업을 하셨다.

자라면서 과연 전쟁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고민해 봤다. 고민의 답을 찾고자 6·25전쟁사를 공부했고, 전쟁 발발 계기와 대한민국이 겪은 아픔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뒤 비로소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전쟁이 나의 존재를 가능케 했지만, 전쟁의 아픔은 잊지 말고 기억하자. 또한 전쟁이 끝나지 않은 한반도에서 언젠가 후손이 내 할아버지와 같은 슬픔을 겪지 않도록 해야겠다. 나는 이런 개인적 책무를 다하고자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살아가고 있고, 조국이 허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우리의 현재도 언젠가 과거가 되기에 지금의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잊히지 않기 위해 몸소 역사를 알고 배워야 한다. 개인과 부대 차원에서 과거 전쟁의 기억과 역사를 재발굴하고 의미를 되새겼으면 한다.

특히 젊은 장병들이 부모님과 조부모님 등 가족을 통해 간접적으로 6·25전쟁을 경험하고 각자의 삶이 이 전쟁과 어떻게 연관됐는지 자각하길 바란다. 가족과 유대감을 심화하고, 이를 확장해 장병 간 유대감을 형성하고 소명의식을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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