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길을 묻다

제발 그대만은 부르지 말아 다오

입력 2024. 06. 19   16:49
업데이트 2024. 06. 1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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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다 - ⑬ ‘비목’ 작사 한명희 선생 (전 국립국악원장) 

이름 없는 비목의 서러움 모르고
얼싸안고 통곡함도 모른 채
순연한 청춘에 깃발 한 번 바쳐 보지 않은

‘총탄 비 오듯 한다’는 말 소설 속 이야기 아니야

60년 전 DMZ 최전방 감시초소에서 똑똑히 확인했지
나와 같은 나이에 산화한 그들
애틋하게 그리운 연인도 인생의 꿈도 있었을 거야
호국·영원·평화의 이름으로 세 개의 촛불 밝혀
영웅 많도록 지원하고 보답하고 기억…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강원도 김화(옛 금성군 지역) 일대에서는 6·25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혈전이 벌어졌다. 휴전에 앞선 중공군의 7월 대공세였다. 12개 사단 23만여 명의 대규모 병력이 국군이 지키던 금성지구 돌출부를 에워싸고 공격에 나섰다. 국군은 이 공격으로 주요 고지를 빼앗겼지만 적근산과 백암산을 연결하는 고지군에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반격에 나서 금성천 이남을 탈환했다. 치열했던 전투로 국군 사상자만 1만4000여 명. 꽃피우지 못한 수많은 20대의 젊음이 싸늘하게 스러져 갔다. 시간이 흐른 그곳에는 남겨진 이름도, 마땅한 무덤도 없었다. 그저 돌무더기 위 작은 ‘비목(碑木)’ 하나만이 쓸쓸히 놓여 있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무명용사의 돌무덤에 세워진 비목을 보고 한명희(전 국립국악원장) 선생이 지은 시다. 한국 음악계의 ‘거목(巨木)’ 장일남 작곡가의 곡과 만나 한국을 대표하는 가곡이 됐다. 제목은 그대로 ‘비목’이라 지었다. 매년 6월 25일 6·25전쟁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어김없이 울려 퍼진다. 탄생 비화를 알고 나면 더욱 처연하다. 한 선생은 “내가 전선에 복무할 때만 해도 막사 주변 빈터에 조금만 삽질을 하면 뼛조각과 해골이 나왔어. 비탈마다 탄띠나 일그러진 수통, 부러진 총대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며 “세월의 두께만큼 낙엽 속에 묻혀 있을 뿐 지금도 그 같은 참상들은 그대로 화석처럼 여일하게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당부를 했다. “풀벌레 울어예는 외로운 골짜기 이름 없는 비목의 서러움을 모르는 사람, 국립묘지의 묘비를 얼싸안고 통곡하는 혈육의 정을 모르는 사람, 순연한 청춘들의 부토 위에 살면서도 아직도 호국영령 앞에 평화의 깃발을 한 번 바쳐 보지 못한 못난 이웃들이여, 제발 그대만은 ‘비목’을 부르지 말아 다오”라고. 글=송시연/사진=김병문 기자


강원도 화천군의 방패막이라고 할 수 있는 백암OP 정상에는 이름 모를 돌무덤에 ‘비목(碑木)’이 세워져 있다. 한명희 선생은 정전협정을 앞두고 치열하게 벌어진 금성전투의 핵심 전투지였던 그곳에서 군 복무를 하며 국민가곡인 ‘비목’을 만들었다.
강원도 화천군의 방패막이라고 할 수 있는 백암OP 정상에는 이름 모를 돌무덤에 ‘비목(碑木)’이 세워져 있다. 한명희 선생은 정전협정을 앞두고 치열하게 벌어진 금성전투의 핵심 전투지였던 그곳에서 군 복무를 하며 국민가곡인 ‘비목’을 만들었다.



- 6·25전쟁의 격전지였던 금성전투 장소인 중동부전선 백암산 비무장지대(DMZ)에서 군 생활을 하셨습니다. 정전협정 이후 10년이 흐른 뒤였음에도 현장은 여전히 참혹했다고 하셨는데요.


“‘총탄이 비 오듯 한다’든가 ‘포탄에 벗겨진 대머리 산’이라는 표현은 소설 속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야. 꼬박 60년 전인 1964년 학군사관(ROTC) 육군소위로 임관해 DMZ에서 최전방 감시초소(GP) 초소장으로 복무하면서 이런 표현들이 진실에서 멀지 않음을 똑똑히 확인했지. 끼니를 때우기 위해 채소를 심을 요량으로 막사 주변에 삽질을 하노라면 어김없이 뼛조각과 해골이 나왔어. 땔감을 얻으려 나무를 베어 톱질하면 박혀 있던 파편으로 인해 톱날이 망가지기 일쑤였고. 순찰 삼아 돌아보는 계곡이며 능선에는 썩어 빠진 탄띠 조각과 녹슨 철모 등이 나뒹굴었어. 실로 몇 개 사단의 젊음이 죽어 갔다는 기막힌 격전의 현장을 똑똑히 본 거야.”


- 지금과는 또 다른 긴장감이었을 것 같은데요. 이렇다 할 경계시스템도 없었을 때였죠. 

“그때만 해도 GP에서 복무한다는 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거였어. 남북을 가르는 경계선은 녹슨 철조망 한두 개가 다였지. 무시로 분계선을 넘어와 도발하고, 심지어 이쪽 장교를 납치해 가는 일까지 있었으니까. 밤에 잠을 잘 때도 완전군장을 하고 군화를 신고 잤어. 물을 길으러 갈 때도, 땔감을 할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사주방어를 해야 했지.”


- GP 복무를 자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두렵진 않으셨나요. 

“광주보병학교에서 3개월 훈련하고 7사단 3연대로 배속돼 강원도 화천에서 군 생활을 했어. 여름에 소대원들하고 도로 보수작업을 하고 있는데 연대장이 애로사항이 없는지 묻더라고. 그때 GP에 들여보내 달라고 했지. 연대장 눈이 휘둥그레지는 거야.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아느냐며 손바닥을 펴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더라고. 막상 들어가 보니까 상상 그 이상이었어. GP 출입문 양 기둥에는 하얀 백골이 얹혀 있었고 막사 지붕에도 적의 수류탄 투척을 대비한 그물망이 처져 있었지.”


- 그럼 ‘비목’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비목’은 우리 민족의 통한이야. 끔찍한 역사 위에 있는 강원도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봄이면 등고선이 초록빛으로 물들고, 가을이면 분홍빛으로 물들지. 그런가 하면 낙원인 양 무리 지어 뛰노는 멧돼지와 노루들의 모습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몰라. 새벽녘에 자욱한 구름바다는 장관이었고, 갈대밭에 물드는 저녁노을은 애상적이었지. 인적 없는 산속에서 자연이 빚어낸 조화는 더욱 절절하게 가슴속에 각인됐어. ‘비목’은 전쟁의 여운과 강원도 산골의 아름다운 자연이 만들어 낸 거야.”


- 왜 ‘비목’이 그렇게 애달프게 느껴지는지 이해가 됩니다. 

“나는 그때 많은 공상에 빠졌었어. 버려진 카빈총 한 자루를 주워 그 주인에 대해 공상을 했지. 카빈총이면 나와 같은 소대장이었을 거야. 나와 같은 나이에 초급장교로 나라를 지키다가 산화한 거야. 애틋하게 그리운 연인도 있었을 거고, 인자한 양친도 있었을 거고, 장래의 진로와 인생의 꿈도 있었을 거야. 그런데 모든 것이 무산되고 말았지. 젊은 비애를 앓고 있었을 때 우연히 흙에 가려진 돌무더기 하나를 발견했어. 사람의 손길이 묻어 있는 돌무더기 근처에는 나무 팻말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전우가 감싸 준 무명용사의 무덤이었던 거야. 카빈총의 주인이자 꿈 많던 젊은 장교의 마지막 현장이었던 거지. 노래 가사 하나쯤은 절로 읊어지지 않았겠어.”


- 명곡을 만들고 지금까지 6·25 참전용사의 희생을 기리고 그들을 돕는 일을 해 오셨잖아요. 

“한 세기도 안 되는 세월이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외국은 전쟁터에서 죽는 걸 가문의 영광으로 알아. 하지만 우리는 다르지. 그 의식을 바꿔야 해. 세계시민의 가치관을 공유할 줄 알아야 해. 제일 바뀌지 않는 게 군인에 대한 국민의 시선과 의식이야. 모두 자기가 잘나 잘 살고 있는 줄 알아. 젊은이들이 피 흘려 나라를 지켰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거야. 한두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문제야. 6·25전쟁은 국지전이 아니야. 세계적인 전쟁이야. 물질적으로는 충분히 보상해 주지 못하더라도 국민의 마음속에는 베테랑들에 대한 존경심이 뿌리 깊이 내려앉아 있어야 해.”

 

작은 초가집 모양의 보관함 안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촛불’이 설치돼 있다.
작은 초가집 모양의 보관함 안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촛불’이 설치돼 있다.



- 현재 살고 계시는 ‘이미시문화서원’(경기도 남양주)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촛불’을 켜 두신 이유도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이시겠지요. 

“세 개의 촛불이 있어. ‘호국의 불’ ‘영원의 불’ ‘평화의 불’이라 이름 붙였지. 호국의 불은 6·25전쟁 60주년인 2010년 6월 25일 강원도 화천 비목공원에서 올린 호국영령 진혼제 직후 향불에서 채화한 불을 옮긴 거고, 영원의 불은 같은 해 10월 3일 단기 4343년 개천절을 맞아 화천 해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와 민족이 영원하라’는 뜻을 담아 채화했어. 평화의 불은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이었던 2013년 해병대 대표 전적지인 도솔산지구전투 전적지에서 열린 행사에서 채화한 거지. 세계 어느 나라를 가 보더라도 공원에 웅장하게 만든 참전기념비가 있고, 그 옆에 불이 타올라. 공원을 산책하는 시민들이 불 앞에 꽃을 바치잖아. 우리나라는 그런 곳이 없어.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매일 아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묵념해. 나라와 민족의 영원을 기도하지. 그렇다고 내가 애국자는 아니야. 애국자는 아무나 되지 못해. 그저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성을 다하는 거야.”


- 그렇다면 진정한 보훈의 의미는 뭘까요. 

“영웅이 많은 사회를 만들어야 해. 선공후사야. 공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킨 사람들은 영웅이야. 영웅이 많은 사회일수록 건전하고 탄탄해. 그런 사람의 비중이 커야 선진사회가 되는 거야. 늘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보답하고 기억해야 해.”


- 지금 이 시간에도 나라를 지키고 있는 장병들을 위해 한마디 해 주세요. 

“나는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게 군대가 기피 대상이라는 거야. 괜한 소리가 아니야. 군대에 가면 배우는 게 많아. 무질서한 생활을 하다가 조직사회에 들어가는 거잖아. 정신적으로 강해지고 좋은 습관을 기를 수 있어. 내 생각만 맞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울 수 있지. 인생사의 수습기간인 셈이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빚어내는 거야. 피동적으로 하지 말고 능동적으로 하면 어려울 게 없어. 그렇다고 요즘 친구들이 나약하다는 건 아니야. 전쟁이 나면 누구나 용감해질 수 있어. 전쟁은 살고 죽는 것에 대한 문제야. 지금 젊은이들이 평화롭고 안전하게만 살아 의식도 희미해지고 미지근해졌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위기 상황이 닥치면 다 해낼 수 있어. 항상 신체를 건강하게 관리하고 선공후사라는 의식만 살아 있다면 용사는 나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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