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현대 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우주는 신의 섭리 아닌 기계법칙으로 움직이는 물질”

입력 2024. 06. 19   16:29
업데이트 2024. 06. 19   16:34
0 댓글

현대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 ⑫ 17세기 과학혁명 (하) 천문학의 발전

사제 코페르니쿠스, 임종 직전 지동설 주장
교황청 탄압, 천문학자들 호기심 막지 못해
케플러, 태양 중심 타원형의 운동법칙 주창
갈릴레이, 최신식 망원경으로 타당성 실증
뉴턴의 만유인력, 수학 공식으로 우주 설명

 

요하네스 케플러 초상화.출처=위키백과
요하네스 케플러 초상화.출처=위키백과

 

아이작 뉴턴 초상화. 출처=위키백과
아이작 뉴턴 초상화. 출처=위키백과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이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시(詩) ‘별 헤는 밤’에 나오는 문구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면서도 읊조릴 때마다 가슴에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그런데 이처럼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집요한 관찰을 목적으로 ‘하늘의 별’을 올려다본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천문학자였다. 17세기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등은 별을 쳐다보면서 새로운 발견을 이어갔고, 마침내 이를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종합한 덕분에 인류는 자연과 우주의 작동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신이 창조한 우주의 비밀을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알아낸 것이었다.

17세기 지성계를 수놓은 일군의 천문학자들은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깨뜨린 균열을 더욱 넓혀 중세 세계관 타파의 선봉장이 됐다. 폴란드 크라쿠프대학에서 수학한 후 가톨릭 사제가 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543)를 발간하면서 새로운 바람이 붙기 시작했다. 임종 직전 선보인 본서에서 그는 중세의 절대적 금기 사항이던 태양중심설, 즉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했다. 태양계와 항성계의 중심은 태양이며 지구는 단지 그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에 불과하다는 명제가 골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1616년 교황청은 그의 책을 금서(禁書)로 지정했다.

당시 유럽인의 우주관은 천동설(天動說)에 기초하고 있었다. 천동설은 기원 2세기경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일한 프톨레마이오스가 자신의 책 『알마게스트』에서 정립한 우주관으로 나름 긴 역사와 정교한 설명 틀을 갖고 있었다. 이에 의하면, 우주는 공안의 공처럼 같은 중심을 지닌 천체들의 집합체이고, 그 안에서 중심은 지구였다. 따라서 태양을 포함한 지구 주변의 다른 천체들은 지구 둘레를 돌고 있는 행성에 불과했다. 여기에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해 놓은 우주관, 즉 달(月)을 경계로 지상계(地上界)는 4원소(흙·물·공기·불)로 이뤄진 불완전한 세계로서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데 비해, 천상계(天上界)는 에테르라는 특수물질로 가득한 영구불변한 세계라는 가설이 더해지면서 천동설은 더욱 정교한 논리체계를 갖춰왔다.

오늘날 삼척동자도 믿는 상식이 왜 당시에는 문제였을까? 왜 가톨릭교회는 우주관의 변화를 그토록 막고자 했을까? 천동설에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고 신의 은총을 받은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존엄한 존재였다. 이때 이들 인간을 신의 세계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주체는 가톨릭교회와 성직자였다. 지구가 천체의 중심이 아니고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에 불과하다면, 지구중심설을 토대로 교회의 계서 및 권위를 확립하고 신의 은총과 섭리를 설파해온 중세 가톨릭교회의 신앙체계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동설을 따르는 것은 극히 불경스러운 죄였다.

 

 

케플러가 묘사한 우주 모형도. 출처=위키백과
케플러가 묘사한 우주 모형도. 출처=위키백과

 

지구중심설(왼쪽)과 태양중심설. 출처=위키백과
지구중심설(왼쪽)과 태양중심설. 출처=위키백과



문제는 교황청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천문학자들의 호기심은 더욱 불타올랐다는 사실이다. 긴 세월 전해져온 고대 사상체계로 실험과 관측을 통해 검증되는 실제 세계의 구성과 움직임을 규명하려다 보니 상호 모순이 거의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일단 코페르니쿠스가 ‘비밀의 방문’을 열어젖히자 1600년 화형당한 G. 브루노처럼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그 안을 엿보려는 ‘위험한’ 인물들이 나타났다. 처음에 이들의 관심은 수학적 질서로 제시된 우주의 운행원리를 실제 관측을 통해 입증하려는 방향으로 집중됐다. 당대 최고의 현장 천문학자였던 튀코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를 거듭한 요하네스 케플러는 마침내 ‘모든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회전한다’는 행성운동법칙을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그 덕분에 기존 천동설로는 설명되지 않던 난제들이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지적 움직임은 여전히 소수 지식인 세계의 범주에 머물러 있었다. 일반인들은 여전히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믿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교회가 이 명제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이때 지동설이라는 새로운 우주관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 중세교회의 토대를 뒤흔든 한 인물이 나타났으니 바로 이탈리아 출신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그는 최신식 망원경을 활용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코페르니쿠스가 반세기 이전에 제기한 지동설의 타당성을 실증해 보이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 역시 1633년 로마의 종교재판정에 서야만 했다. 그는 『대화』에서 지동설 유포를 금하는 교회의 1616년 칙령을 어기고 태양중심설이 단순히 하나의 가설이 아니라 진리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재판정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는 자필 자백서에 서명한 후 자신의 주장 철회를 공개적으로 선언해야만 했다. 물론 오늘날 그가 종교재판정을 나오면서 토설했다는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는 말은 진위를 떠나 갈릴레이의 금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면 선구자들의 개별적인 발견을 과연 누가, 어떻게 하나의 원리로 정리 및 종합했을까? 근대의 문을 연 철학 및 천문학 분야 선구자들이 이룬 업적을 하나의 간단한 수학 공식으로 종합해 ‘천재의 세기’ 정점을 찍은 인물은 바로 영국의 아이작 뉴턴이었다. 잘 알려졌듯이 그는 1687년 선보인 『프린키피아(Principia)』 즉,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제시해 복잡한 우주의 운행원리를 간결한 수학 공식으로 설명했다.

마침내 천체운동을 지동설로 설명한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은 케플러의 관측으로 실증적 토대를 얻은 후 뉴턴에 의해 굳건한 합리적 우주관으로 정립됐다. 뉴턴 자신의 표현대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 이를 후대에 선물한 것이다. 그 덕분에 이제 우리는 무한히 넓고 복잡한 우주의 제반 현상을 간단한 수학 공식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됐다. 이제 우주는 신의 오묘한 섭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기계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물질체계로 인식됐다. 20세기 초반 또 다른 천재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수정되기는 했으나, 뉴턴의 등장으로 중세의 계층적 우주관은 기계론적 우주관으로 대체됐다. 그래서 1727년 뉴턴이 숨을 거두었을 때, 당대 영국 최고의 시인이던 알렉산더 포프는 “자연과 자연법칙들은 어둠 속에 있었네. 그때 신께서 말씀하시길,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모든 것이 밝아졌네”라고 칭송했다.

이러한 우주관의 변화는 단지 천문학과 물리학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과학적 사고방식은 다른 학문 분야에도 적용돼 이후 서구인의 삶 전체를 변화시켰다. 17세기 우주를 관찰하던 인간 지성의 눈은 18세기에 접어들어 인간 세계 즉, 유럽의 정치와 사회라는 현실세계로 향했다. “이제 너 자신을 알아라. 더 이상 신이나 자연을 알려고 하지 말라. 인류에게 적합한 연구 대상은 바로 인간이다”란 금언을 읊조리며 인간사회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계몽주의의 사조 아래 각 분야에서 불합리한 요소들을 찾아내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고, 급기야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폭발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회에서 이어진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