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6·25전쟁이 주는 세 가지의 일깨움

입력 2024. 06. 13   16:34
업데이트 2024. 06. 13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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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74년 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3년 동안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한반도를 피로 물들였다. 북한군은 무방비의 한국군을 밀어붙여 나흘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내달려 적화통일을 눈앞에 뒀지만, 유엔군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된다.

백선엽 장군이 다부동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하면서 반격에 나선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고 20일 평양을 해방한 후 압록강까지 진출하지만, 중공군이 출현하면서 전세는 금세 재역전된다. 중공군은 그해 겨울 1, 2차 공세를 통해 유엔군을 38선 이남으로 밀어내고 3차 공세를 통해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재점령한다. 이후 유엔군과 한국군이 중공군의 4차 공세를 저지하고 3월 16일 서울을 재탈환한 후 ‘춘계공세’로 불리는 중공군의 5, 6차 공세까지 막아내자 전쟁은 중부전선에서 교착된다.

이후 휴전회담과 병행해 뺏고 빼앗기는 고지전이 이어지다가 1953년 7월 중공군의 7차 공세가 마감되면서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된다. 4만여 명의 생존 참전용사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6·25전쟁 1129일의 역사다. 이 역사는 우리에게 세 가지의 거대한 일깨움을 주고 있다.

첫째, 6·25의 참상은 어떻게든 전쟁 재발은 막아야 한다는 뼈에 사무치는 일깨움을 줬다. 한국은 14만여 명의 군경 전사자와 50만여 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민간인 피해도 사망 24만 명, 부상 23만 명, 북한군에 의한 학살 13만 명, 납북 8만5000명, 실종 30만 명 등으로 엄청났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피해는 더 컸다. 국토는 잿더미로 변했고, 무수한 이별과 비극이 양산됐다.

둘째, 6·25는 동맹과 우방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전쟁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을 외면했다면 그리고 유엔군이 파병되도록 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1950년 8월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유엔군은 4만여 명의 전사자와 10만여 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는데 대부분은 미군이었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이 누리는 자유도 경제적 번영도 없을 것이다.

셋째, 6·25가 근대국가로의 재탄생을 가능하게 한 전기였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정전 이후 한국은 ‘잘사는 근대국가’ 모습을 급속히 갖춰 나갔는데, 그 이유로는 봉건체제 청산, 자유민주주의 정착, 한미동맹, 자유경쟁을 통한 기업 육성, 개인 소유권 보장, 서방세계 편입에 따른 무역 활성화, 북한 고급 인력의 월남과 해외 한국인 유입으로 인한 인력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즉, 전쟁을 통해 동맹이라는 안보 방패를 구축하고 한국 사회를 ‘리셋(reset)’함으로써 양반도 천민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만들었다.

이 모든 변화가 6·25를 통해 한꺼번에 유입된 것이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3년 1인당 국민소득(GNI)은 3만6000달러로 처음으로 일본을 앞지르는 신기원을 이룩했다. 반면 정권 유지를 위해 개인 소유권, 자유, 경쟁 등이 창출하는 창의력과 효율성을 포기한 북한은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했다. 국민총소득 58배, 개인소득 28배, 무역 1800배, 전력생산 12배, 자동차 생산 1550배 등의 수치가 이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지금 한반도는 동유럽, 중동, 대만해협 등과 함께 신냉전의 최전방이다. 이런 시기에는 6·25가 주는 세 가지의 일깨움을 반추해 보고 그동안 이룩한 ‘민주주의와 경제 기적’을 지켜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되새겨보는 것도 6·25전쟁 74주년을 뜻 있게 보내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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