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골목 속으로 - ⑩ 둘리의 고향, 쌍문동
1980~90년대 서울의 역사 층층이 쌓인 동네
낮은 주택과 삐뚤빼뚤 전깃줄
촌스러운 붉은 벽돌집도 낭만 가득
벗겨지고 퇴색한 420m 초대형 벽화
단돈 6500원 햄버그스테이크
엄마·아빠 함께 추억 속으로…
‘응답하라 1988’과 ‘아기공룡 둘리’의 배경이 된 쌍문동은 서울 북쪽의 유서 깊은 동네다. 북한산으로 둘러싸인 낮은 단독주택들은 1980~1990년대 서울의 역사를 층층이 쌓아 놨다. 1980년대 쌍문동에선 다방구(술래잡기의 변형된 형태)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했다. 여자아이들은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땀을 뻘뻘 흘렸다. 아파트가 대세인 요즘에도 꿋꿋이 남은 쌍문동 골목이 그래서 더 반갑고 고맙다. 개발 논리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골목의 낭만은 향긋하면서도 위태롭다. 여행은 뭔가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읽으러 가는 것이다. 그때의 건물, 그때의 창문, 그때의 옥상을 천천히 읽으며 쌍문동을 걸어 보자. 어머니·아버지가 살았을 법한 골목엔 무한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응답하라 1988’이 택한 옛 서울의 낭만
쌍문동은 경기도 의정부와 가까운 서울 외곽지역이다. 큰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왜 많은 장소 중 쌍문동을 택했을까? 실제 촬영지는 인천과 서울의 구도심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제작진이 쌍문동으로 못 박은 이유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서민 동네였기 때문이다. 부자보다는 평균적인 임금 노동자가 훨씬 많이 살던, 떠들썩한 사람 소음이 가득한 쌍문동이 제격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쌍문동이 코앞인 미아리에서 태어났다. 미아리 사람들에겐 쌍문동이 부촌이었다. 평지에 나란히 지어진 붉은 벽돌의 집들은, 미아리에선 쉽게 볼 수 없는 반듯함이었다. 지금은 아파트에 비해 인기가 덜한 주거 공간이 됐지만, 당시엔 현관과 대문이 분리된 복층 구조 집들이 부의 상징이었다. 30년 만에 찾은 쌍문동은 그립고, 살고 싶은 취향 저격의 동네였다. 이렇게 예뻤던 곳에서 나의 쌍문동 친구들도 살았다. 그때는 그 예쁨을 몰랐고, 지금은 안다. 마법에 홀린 듯 몇 시간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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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눈으로 보는 옛 골목의 가치
여행자가 되면 어디든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좁아터진 골목 역시 낭만 가득한 풍경이다. 실제로 살고 있는 이들에겐 주차도 힘들고, 두 차가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후진을 한참 해야 하는 골치 아픈 좁은 길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사심 가득 좋기만 하다. 삐뚤빼뚤 전깃줄이 하늘을 가려도, 그것 역시 잊고 지내던 추억이 된다.
흔히 ‘빌라’라고 부르는 다세대주택은 붉은 벽돌을 주로 썼다. 그때는 저렴한 건축 재료였으나 지금은 콘크리트·철재·유리 등이 부상하면서 잘 부서지고 상대적으로 비싼 재료로 인식된다. 벽돌은 흙을 구운 것이다. 천연 재료라서 인체에 무해하다. 단열·흡음(층간 소음이 얼마나 괴로운 문제인가)·탈취에도 강한 자재다.
촌스럽고 어딘가 모르게 낙후된 느낌의 붉은색 집들은 지금은 건축가들에게 쓸모 있는 고전적 재료로 재해석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 일본의 요코하마는 붉은 벽돌집을 역사적 가치로 인식하고 특색 있는 도시의 자랑으로 꾸며놓기도 했다. 벽돌의 붉은색은 염료나 안료가 아니라, 흙의 산화철이 산소를 흡수하며 발생하는 자연색이다. 어쩐지 눈이 덜 피로하고 가로수와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면 아마 자연의 미를 단번에 알아챘기 때문일 것이다.
둘리가 정착한 둘리네 집, 쌍문동
쌍문동은 둘리의 동네다. 1억 년이나 빙하에 갇혀 있던 아기 공룡 둘리는 흘러흘러 고길동의 딸 영희에게 발견된다. 둘리가 빙하를 타고 온 곳은 정확히 어디일까? 420m 초대형 벽화가 그려진 우이천이 영희가 둘리를 발견한 개천으로 추정된다. 벽화는 많이 벗겨지고 퇴색됐지만 우이천 주변은 사랑스럽기만 하다.
밤의 우이천은 손꼽히는 데이트 명소다. 한강 주변이 더 거대하고 볼 것도 많지만 우이천은 우이천만의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단일 캐릭터 벽화로는 우리나라에서 이보다 더 긴 벽화는 없다. 둘리 벽화를 따라 걷다 보면 만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온갖 악행으로 고길동을 괴롭히던 둘리가 얄밉다는 생각을 한다. 철이 들면서 화만 내던 고길동이 늘 당하던 피해자였음을 깨닫는다. 나이에 상관없이 둘리를 모르는 이가 없다. 둘리가 있는 쌍문동은 그러니까 국민 골목이고, 국민 여행지인 셈이다. 어머니·아버지와 함께 방문하기에도 이만한 곳이 없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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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맛집이 숨어 있다
‘말해 줄까? 말까?’ 나만 알고 싶은 단골집이 있다. 전국 아니 세계를 돌아다니며 맛집 탐방에 열을 올렸다. 태국 방콕에서 1년간 식당만 다니며 방콕 맛집 책을 냈으니, 나만큼 음식에 진심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전국 곳곳의 맛집이란 맛집은 샅샅이 찾아다녔다. ‘다래함박스텍’은 한국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이다. 우이천에서 30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다.
햄버그스테이크가 주메뉴다. 햄버그스테이크는 고기를 다져 구운 요리다. 흔하다면 흔한 요리고, 햄버거 패티가 햄버그스테이크다. 그걸 단돈 6500원에 판다. 달걀 프라이까지 올려 주는데 6500원이다. 1만6500원이라고 해도 싸다 했을 정도로 양과 식감도 훌륭하다. 도쿄에서, 오사카에서 먹었던 최고의 햄버그스테이크가 기억이 안 날 정도다. 당연히 대기 줄은 길지만 빨리 준다. 그러니 국보급 햄버그스테이크를 절대 포기하지 말 것.
둘리도 있고, 맛집도 있고. 쌍문동은 이래저래 참 소중한 여행지다. 이미 차고 넘치는 아파트가 쌍문동까지 침범하지 않기를. 그래서 영원히 우리의 추억으로 남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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