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육군

잊지 말아야 할 읊조림… 잃지 말아야 할 숭고함

입력 2024. 06. 09   14:22
업데이트 2024. 06. 0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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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 기억될 역사 기억할 영웅
육군9보병사단 자체 제작 뮤지컬 '백마고지의 일기'


전군 최초 전쟁사 창작 낭독극
‘철의 삼각지대’ 백마고지전투 배경
김종오 장군, 육탄 3용사 이야기

전쟁 앞에 선 자의 두려움
굳은 결의 속 스러져 간 전우
“백마” 나직이 울려퍼지자 숙연
‘백전백승 프로젝트’ 중 하나
영광스러운 부대 역사
가슴으로 느끼고 애대심 가지길…

시간대를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타임머신’은 SF 영화의 단골 소재다. 과거로 돌아가 개인의 잘못을 바로잡거나 역사적인 현장에서 결과를 뒤집으면서 현재가 달라지고 온갖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현실에서는 아직 불가능한 일이기에 상상에 그치지만, 과거의 현장을 재현하면서 그때의 상황을 체험해 보고 당시 인물들의 감정을 느껴볼 방법은 있다. 바로 공연이나 영화, 책 등의 예술 작품이다. 육군9보병사단에서 특별히 마련한 군 최초 전쟁사 창작 낭독극 ‘백마고지의 일기’를 현장에서 본 장병들의 붉어진 눈시울과 우레와 같은 박수 세례로 예술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극적으로 연결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글=배지열/사진=조종원 기자

 

지난 4일 육군9보병사단 사령부에서 열린 군 최초 전쟁사 창작 낭독극 ‘백마고지의 일기’ 공연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고 있다.
지난 4일 육군9보병사단 사령부에서 열린 군 최초 전쟁사 창작 낭독극 ‘백마고지의 일기’ 공연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고 있다.

 


무대 위 옮겨진 김종오 장군과 육탄 3용사

“백마!” 곳곳에서 각 잡힌 경례와 함께 우렁찬 구호가 울려 퍼지는 이곳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육군9보병사단 사령부.

지난 4일 이곳에서는 전군 최초로 전문 작가와 배우가 만든 각본과 연출을 바탕으로 연기와 내레이션·음악이 어우러진 백마고지전투 창작극 ‘백마고지의 일기’의 막이 올랐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강원도 철원군과 김화·평강 지역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에서 국군 9사단이 중국군의 대공세에 맞서 승리한 전투다. 아군과 적군을 합해 27만여 발의 포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고지의 높이가 1m 낮아졌으며, 고지 주인도 24번이나 바뀔 만큼 치열한 전투였다.

이번에 부대에서 제작해 장병들에게 선보이는 ‘백마고지의 일기’는 백마고지전투의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다. 당시 사단장으로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한 김종오 장군과 몸을 던져 고지 탈환에 일조하고 장렬하게 산화한 육탄 3용사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이상 추서 계급)가 주인공이다.

공연은 잔잔한 음악과 함께 나무로 만든 비석인 비목(碑木)이 세워진 처참한 전장의 모습을 그린 애니메이션이 배경으로 나타나면서 막을 올렸다. 강승우 소위 역을 맡은 임현수 배우가 낮게 읊조리는 내레이션에 이어 가곡 ‘비목’을 라이브로 부르면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김종오 장군의 일기장이 펼쳐지는 장면과 함께 시작된 1장은 ‘가족을 그리는 마음이 하늘의 별이 되어’라는 주제로 전투를 앞둔 장병들의 사연과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그려졌다. 위독한 어머니를 두고 입대한 오규봉 일병은 가족사진과 편지를 보면서 엄마 품을 그렸다. 그의 모습을 연기한 강민석 배우의 목소리에서 애절함이 느껴졌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배경으로 이어진 2장 ‘해가 지지 않는 곳, 백마고지’에서는 치열한 전투 진행 상황이 묘사됐다. 안영권 일병 역의 민대식 배우는 태어난 지 일 년 된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을 그려냈다.

3장 ‘이 한 몸 바쳐’에서는 육탄 3용사의 희생과 헌신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적의 기관총 진지를 무너뜨리기 위해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직접 들고 돌진하겠다는 이들의 결심이 군가 ‘전선을 간다’를 배경으로 깊은 감동을 불러왔다.

마침내 승리한 부대에는 대통령의 ‘사전불퇴 상승백마’라는 휘호가 주어졌다. 황만익 배우가 연기한 김종오 장군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전장에서 스러져 간 전우들의 용맹함을 기렸다. 모든 배우가 옛날 애국가를 합창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극이 마무리됐다.

어느새 실제 전쟁영웅들에게 감정 이입한 배우들의 목소리에도 감정이 섞여 떨려왔다. 장병들도 어느 때보다 높은 집중도를 보여주면서 극에 몰입했다. 극이 마무리되자, 관객석에서 환호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배우들도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감사함을 표했다.

공연을 관람한 이창준 병장은 “공연을 보면서 내가 백마고지전투 전사의 후예라는 것에 자부심이 생겼다”며 “선배님들의 희생정신이 헛되지 않도록 임무에 매진하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박진원(소장·진) 사단장도 “백마고지 전투를 극으로 흥미롭고 이해하기 쉽게 연출해 주신 덕분에 나 또한 부대 역사를 더 잘 알게 됐다”며 “대극장 뮤지컬 못지않은 감동과 교훈으로 장병들에게도 좋은 교육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9사단 창작극 ‘백마고지의 일기’ 연출진과 출연진. 왼쪽부터 안현주 작가, 서혜선 음악감독, 황만익·민대식·강민석·임현수 배우.
9사단 창작극 ‘백마고지의 일기’ 연출진과 출연진. 왼쪽부터 안현주 작가, 서혜선 음악감독, 황만익·민대식·강민석·임현수 배우.

 

진지한 표정으로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9사단 장병들.
진지한 표정으로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9사단 장병들.



“장병들이 긍지를 느끼는 계기 되길”

이번 공연은 2018년 공연된 뮤지컬 ‘길 위의 나라’ 제작진과 사단이 힘을 합쳐 탄생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해당 공연을 본 사단 정훈부에서 제안했다. 각본을 쓴 안현주 작가는 “군대와 전쟁도 살아 있는 역사인데, 지금까지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야기여서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야전부대에서 이러한 공연을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연 제작에 참여한 김현수(대위) 사단 홍보문화장교는 “생소한 장르인 만큼 정훈장교 임무수행 기간 중 가장 의미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며 “장병들이 이번 공연으로 영광스러운 부대의 역사를 눈과 귀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애대심을 가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배우진으로는 영화 ‘강철비’ ‘두근두근 내 인생’을 포함해 다양한 뮤지컬에 출연한 실력파 배우 황만익이 중심을 잡았다. 뮤지컬 ‘영웅’의 주연 안중근 역을 연기했던 임현수와 영화 ‘1987’ ‘판도라’에 나온 강민석, 연극 ‘호두까기 인형’ 등에 출연한 민대식도 이번 공연에 함께했다.

출연과 연출까지 맡은 황 배우는 “저희도 공연을 준비하면서 국군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며 “앞으로는 낭독극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된 군 문화 사업 활성화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사단에서 추진 중인 ‘백전백승 프로젝트’의 하나다. 백전백승은 ‘백마고지 전승지에서 찾은 백승(항상 승리)의 정신’을 의미한다. 사단은 지난해 12월부터 전문해설사와 함께하는 스토리텔링식 ‘백마고지 전투현장 안보견학’(본지 1월 3일 자 9면 보도)을 진행하고 있다. 백마고지가 한눈에 보이는 소이산에 오르고 전적비를 참배하는 활동이다. 사령부 전 간부를 대상으로 하는 이 프로젝트는 중대장, 행정보급관, 정훈장교 순으로 이어졌고 사단 전 장병을 대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또한 육탄 3용사의 추모행사 시기에 맞춰 이번 극을 준비했다. 각 장병의 고향인 제주(강 중위, 지난 5일 제주 탐라 자유회관), 전북 김제시(안 하사, 지난 6일 김제 안영권 전공추모비), 충남 천안시(오 하사, 지난 7일 천안 성환초등학교)에서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렸다. 부대는 화환과 군악대를 지원하고 부사단장이 직접 참석하는 등 예우를 다하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한 오는 25일에는 사단의 현행 작전을 책임지는 강안경계부대 장병 대상으로도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사단은 문화예술을 통해 장병들의 정신전력 증진과 부대의 역사와 전통을 알리는 ‘일행다득’의 공연이자 교육으로 이러한 기회를 마련했다. 앞으로도 실질적이고 실효성 있는 정신전력교육을 위해 지속해서 노력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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