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은 대부분 범죄를 저질러 고향에서 도망치거나 강제로 끌려와 해적선을 타고 다니며 떼를 지어 사람을 해치거나 재물을 훔치는 범죄자다. 아무 거리낄 것 없는 망망대해에서 그들은 어떻게 스스로 질서를 유지했을까? 분탕질과 노략질로 바다를 무법천지(無法天地)로 만드는 유전자(DNA)가 어떻게 해적선 안에선 상명하복(上命下服)과 상호협력의 양순한 DNA로 길들 수 있었을까?
좁은 해적선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은 대개 강압적인 폭력이다.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해적선장의 이미지는 거의 험상궂은 얼굴에 흉한 상처와 지저분한 수염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몸도 성하지 않다. 대개 한쪽 눈을 잃은 애꾸로, 한 팔은 손 대신 갈고리를 달고 있고 한 발은 발목 대신 지겟다리를 짚고 있다. 오랜 세월 거친 바다와 폭도를 상대로 싸워 이긴 ‘계급장’이다.
습관적인 폭력의 가혹한 현장은 냉소적인 은어 뒤로 숨는다. 예를 들어 두 손과 두 발이 묶인 ‘통닭’ 자세로 당하는 고문을 ‘통닭구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폭력은 해적을 과연 얼마나 길들일 수 있을까?
‘검은 남작(Black Bart)’ 바살러뮤 로버츠는 18세기 카리브해에서 활동한 해적이다.
1720년 어느 날, 힘들게 노획한 포르투갈 보물선 한 척을 부관이 부하 여러 명과 함께 훔쳐 도망갔다. 격분한 로버츠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적이 지켜야 할 조항을 담은 ‘해적규정(Pirate Code)’을 만든 뒤 다 같이 서명하고 성서에 손을 얹고 맹세하게 했다.
흉악하고 무식한 해적도 성경은 두려워했나 보다.
‘해적규정’은 같은 배를 탄 모든 해적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줬다. 아무리 밑바닥 인생이라도 백인이든 흑인이든 해적선에 필요한 역량을 높이 샀다. 선장은 전투에서만 절대적인 지휘권을 갖고, 일상생활은 평의회의 결정을 따랐다. 선장이라도 전리품이 3배를 넘지 않도록 공정하게 나눴다. 기강을 잡기 위해 배 안에서 노름과 싸움을 금지하고,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해적질을 하다가 당할 수 있는 사망·장애에 대비한 보상과 연금까지 계산했다.
‘검은 남작’은 가장 성공한 해적선장으로 꼽힌다. ‘해적규정’ 덕분이었을까? 1년도 안 되는 기간 무려 400척이 넘는 배를 약탈했다. 요즘 가치로 치면 3200만 달러(약 420억 원)쯤 된다.
그가 내건 깃발은 해적을 상징하는 ‘졸리로저(Jolly Roger)’의 초안처럼 여겨진다. 해골 아래 X로 겹친 두 넙다리뼈 그림이다. 영화처럼 짧은 그의 삶은 ‘프린세스 브라이드’ ‘보물섬’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로 되살아났다.
‘해적의 황금시대’(1716~1726)에 카리브해, 아메리카 동해안, 아프리카 서해안, 인도양 일대에서 날뛰던 해적선들은 나름대로 규정이 있었다. ‘검은 수염(Black Beard)’ ‘캘리코 잭(Calico Jack)’ ‘블랙샘(Black Sam)’ ‘플라잉더치맨(Flying Dutchman)’에 비해 ‘검은 남작’이 훨씬 큰 성과를 거둔 이유는 같은 배를 탄 해적들이 함께 ‘해적규정’을 만들고 공감·실천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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