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왕족도 아닌데 ‘능’이라 불린 묘의 주인은…

입력 2024. 06. 05   15:46
업데이트 2024. 06. 06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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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그때 그곳 - 남양주 능내리, 왕능 같은 묘가 있는 마을

인수대비의 아버지, 조선 문신 한확
태종·세종도 건드릴 수 없던 위세
누이들 명나라 황실 공녀로 보내고
두 딸은 왕가로 시집보내 가문 키워
세조가 자신의 능 자리 줬다는 설도

능내리 한확의 신도각과 묘. 필자 제공
능내리 한확의 신도각과 묘. 필자 제공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는 구보에게 늘 궁금하던 지명이었다. 2008년 12월 29일로 폐역된 능내역을 지날 때마다 그곳에 왕가의 능이 있나 여겼다. 나중에야 문신의 묘가 왕릉처럼 대우받은 연고로 ‘능내(陵內)’라는 지명이 생겼음을 알게 됐다. 조선 초기 좌의정을 지낸 한확(1403~1456)이 그 주인공이다.

한확의 묘는 능으로 불렸을 만큼 그 위세가 당당하다. 수령 수백 년의 향나무와 함께 서 있는 신도비각을 비롯해 문인석과 망주석, 장명등, 혼유석, 향로석을 두루 갖췄다. 능 뒤로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서원부원군이라는 봉호에서 보듯이 그는 왕가의 사돈 신분이었다. 그는 딸 둘을 왕가에 시집보낸 이로 유명하다. 둘째 딸은 세종대왕의 8남 계양군에게, 여섯째 딸은 수양대군의 장남에게 각각 시집보냈다. 이 여섯째 딸이 저 유명한 인수대비다.

한확은 두 딸 이전에 두 누이를 명나라 황실에 공녀로 보낸 전력이 있어 집안 여자들을 이용해 가문을 높이는 데 남다른 특징을 보였다. 한확은 부친인 한영정이 영의정을 지내 명문가 출신이어서 음서제 혜택을 받아 벼슬길에 나서 있었으나 한미해진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두 누이를 이용해 명 황실의 사돈이 됐다.

원(元)나라의 공녀 풍습은 명(明)이 들어서면서 사라지는 듯했으나 3대 영락제가 정비를 잃은 후 조선에 공녀를 보낼 것을 요구함으로써 부활했다. 왕족과 귀족 집안의 여식을 지정한 명의 공녀 요청이 있자 태종은 둘째 딸 경정공주(1387~1455)를 서둘러 결혼시켰다. 부마 조대림은 모친상 중이라 혼사를 치를 수 없었지만 태종은 강행했다. 공녀는 조선 국왕도 피해 갈 수 없는 요구였던 까닭이다. 전국에는 금혼령이 떨어졌다. 조혼 풍습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1차로 공녀들을 보냈으나 영락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재선발을 요구했다. 2차 공녀에 한확의 누나 등 2명의 여성이 뽑혔다. 태종 17년 8월 6일 두 공녀가 명 사신을 따라 베이징으로 향하는 길목에 사람들이 나와 울음을 터뜨렸다(『태종실록』).

한확의 누나는 19살에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으로 시작해 미모와 지모로 총애를 받아 20대 초반에 ‘강혜장숙여비’ 한씨에 봉해졌다. 영락제는 여비(麗妃)의 남동생인 한확에게도 정5품 ‘소경(少卿)’ 벼슬을 내리고 사위로 삼으려 했다. 세조 2년 9월 11일 『세조실록』은 ‘인종황제가 한확을 부마로 삼고자 했으나, 한확이 노모를 모셔야 한다며 사양해 이뤄지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한확은 영락제가 호감을 가질 만큼 미남이었다. 『세조실록』에서도 그를 ‘미풍의(美風儀)’ ‘준정(峻整)’으로 표현해 준수한 용모였음을 알렸다. 누이와 함께 간 공녀 가운데 황씨가 이미 사통해 임신한 사실이 드러나 영락제가 대로하면서 양국이 긴장 국면에 놓였을 때 여비와 한확 남매가 “사가의 일까지 정부가 알 수는 없는 법”이라고 설득하며 영락제를 누그러뜨림으로써 외교참사로 비화될 뻔했던 일을 막았다.

여비는 영락제가 몽골과의 전투에서 숨지자 순장 풍습에 따라 24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다. 한확의 운도 다한 듯 보였으나 영락제의 손자 선덕제가 조부처럼 조선에 공녀를 요구해 오자 한확은 기다렸다는 듯 그 요청을 반겼다. 여동생 계란을 염두에 둔 까닭이었다. 세간에서는 비난이 일었다. “한확은 재산이 넉넉하면서도 장차 공녀로 바치기 위해 혼기가 지난 누이를 시집보내지 않았다며 사람들이 누이를 슬피 여겼다”(『세종실록』 1428.10.4).


능내 폐역. 필자 제공
능내 폐역. 필자 제공



언니의 비극을 지켜본 여동생 계란은 오빠에게 저항하며 가지 않으려 버텼으나 이번에는 명 황실에서 한계란의 미모를 이미 알고 지목해서 요구한 터라 어쩔 수 없었다. 19살의 나이로 베이징으로 향하는 계란의 가마를 보고 “언니가 생매장당한 것도 억울한데, 이번엔 동생이 산송장이 돼 떠나는구나”라며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세조실록』은 전한다.

명 황실에 들어간 계란은 부드러운 말과 공손한 태도로 여러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줬다.

하늘이 보살폈는지 선덕제 사후에도 순장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정통제의 세 살배기 아들을 보살폈는데 이 아이가 나중에 성화제에 오르면서 황실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며 황실 최고 어른 대접(老老)을 받았다. 여동생 덕분에 한확도 입지가 높아져 한성판윤·도관찰사·절제사·판서·찬성·좌의정에 이르기까지 고위직을 두루 섭렵했다. 명 황제 알현이나 명 사신 접대 등도 도맡아 했다. 그의 존재 덕에 금과 은을 공물로 바치던 관습을 면제받았고, 명 사신들의 횡포도 없었다. 구보는 개인의 사심이 뜻밖에도 공익 효과를 불러온 사실에 아이러니를 느낀다.

한확은 태종과 세종을 포함한 조선 왕들도 건드릴 수 없는 위치가 됐다.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의 쿠데타 계유정난에도 적극 협조했으며, 세조의 즉위를 인정받는 임무를 갖고 사은사로 베이징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확은 마지막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하고 귀국하던 도중 객사했다. 세조는 한확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조회(朝會)와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생일 축하를 받지 않았을 정도로 슬픔에 빠졌다(『세조실록』 2년 9월 24일). 세조는 양절공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자신의 사후 함께 배향하도록 배려했다. 신도비도 당대 최고 장인들에게 맡겨 쌍용 머릿돌과 연꽃 받침돌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도록 했다(『국가문화유산포털』). 한확과 세조는 사돈지간이어서 더욱 막역했다. 세조가 ‘자신의 능 자리로 지목한 곳을 한확에게 주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였다. 구보는 그 정도였으니 ‘능내’라는 지명이 생겨날 법했다고 여긴다.

한확의 여섯째 딸은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세조에 즉위하면서 세자빈에 책봉됐으나 남편 의경세자가 요절하면서 왕비가 될 기회를 놓쳐야 했다. 훗날 차남이 성종에 오르면서 소혜왕후로 추존되고 인수대비가 된다. 묘역 중간 우측에 있는 한확의 부인 남양 홍씨 묘에도 조선사대부 부인 묘로는 유일하게 신도비가 서 있다. 딸 인수대비의 힘이 느껴진다. 한확은 딸들뿐 아니라 3남 한치례도 세종의 적녀 정의공주의 차녀와 혼인시킴으로써 왕실과 사돈 맺기에 천부적 재능을 보였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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