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군인들 - 43. 애국 무관들의 집결처 신민회
도산 안창호 주축 결성 비밀결사단체
무관 이갑·유동열·이동휘 등 창립위원
각지에 학교·회사 세워 교육·자금축적
1910년 ‘독립전쟁전략’ 무장투쟁 전환
한일병탄·자금조달 난항으로 계획 차질
신민회 창설 주역들 미·중·러 망명길
대한제국 시절 수많은 단체가 명멸했다. 일본이 전국의 산림과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맹렬하게 반대했던 보안회(1904년 7월), 근대적인 입헌 의회제도 수립을 목적으로 창설한 헌정연구회(1905년 5월), 헌정연구회를 확대해 발족한 민중 계몽단체 대한자강회(1906년 4월) 등이다. 항일투쟁을 목표로 했던 이들 단체는 모두 공식적인 조직이었다.
그런데 1907년 4월에 비밀결사단체가 탄생했다. 신민회(新民會)였다. 비밀결사라는 말에 걸맞게 그만큼 은밀하고 정체성이 확실한 단체였다. 신민회가 비밀결사체로 조직된 이유는 그 이전에 활동했던 공식적인 단체로는 애국계몽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칠 수 없어서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예전의 단체들에 친일파가 많이 침투하는 바람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신민회를 조직한 주역은 도산 안창호였다. 하지만 자금을 대고 실무를 맡았던 중심인물은 이갑과 유동열이었다.
1878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한 안창호는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민중 계몽운동에 뛰어든 열혈 청년이었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거침없는 웅변으로 수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 준 명연설가였다.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의 남녀공학인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는 등 활발한 계몽 활동을 펼치던 안창호는 1902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안창호는 유학 중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共立協會·1905년 4월)를 만들어 동포들의 권익 보호에 힘썼다. 그러던 중 조국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됐다는 비보를 접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청년 선각자였다.
1907년 2월 20일, 안창호가 서울에 나타났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이갑 참령이 찾아갔다. 이갑과 안창호는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의기투합했다. 당시 이갑의 나이는 30세, 안창호는 29세였다. 게다가 두 사람은 모두 평안도 출신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평생 동지가 된다.
안창호는 수시로 이갑의 집을 드나들었다. 상당한 재력가이기도 했던 이갑의 집은 애국계몽운동을 하는 무관·지사들이 모여 구국의 방안을 토론하는 장소였다. 안창호가 귀국한 지 2개월 만인 1907년 4월 20일경, 이갑과 안창호가 주도해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를 창립했다. 신민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크게 다섯 세력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안창호·이강 등 미주에서 활동했던 공립협회 세력이었고, 두 번째는 양기탁·박은식·신채호 등 ‘대한매일신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세력이었다. 세 번째 세력은 상동교회와 부설기관인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하는 전덕기·이동녕·이회영·이준 등이었고, 네 번째는 이승훈·안태국 등 평안도 지역의 상인과 실업인 집단이었다. 다섯 번째는 유동열·이갑·이동휘 등 무관 출신 세력이었다.
신민회의 창립위원은 각 세력을 대표하는 7명이었다. 안창호, 이갑 참령, 유동열 참령, 이동휘 예비역 참령, 언론인 양기탁, 교육사업가 이동녕, 기독교 전덕기 목사가 그들이었다. 이들 중 무려 세 사람이 전·현직 무관이었다. 이후 노백린 정령, 김희선 정위, 조성환 참위 등의 무관들도 신민회에 합류하게 된다.
7명의 창립위원은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인사들을 신민회에 가입시켜 세력을 넓혀 나갔다. 그 결과 1910년경에는 회원 수가 800여 명에 달하는 전국적인 규모의 애국계몽단체로 성장하게 된다.
민족계열 신문인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로 활동한 장지연과 신채호, 유학자이며 황성신문 주필이었던 박은식, 평안도의 자산가인 이승훈과 안태국, 평양 대성학교 교장 최광옥, 함경도의 자산가인 이종호, 이회영·이시영 6형제 등 신민회 회원은 당시 신망 깊은 인사들을 망라하고 있었다.
신민회의 목적은 네 가지였다.
첫째,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교육한다. 둘째, 뜻있는 동지를 확보해 역량을 축적한다. 셋째, 각지에 교육기관을 설치해 청소년을 교육한다. 넷째, 각종 상업기관(회사)을 경영해 국민적인 재산을 축적한다.
이에 따라 신민회는 평양에 대성학교,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 등 각지에 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평양에 마산동(馬山洞) 도자기 회사를 세운 것을 비롯해 협성동사(協成同事)·상무동사(商務同事)·조선실업회사 등의 회사를 설립했다.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활용했으며, 평양·서울·대구 등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이라는 서점을 경영했다.
하지만 신민회의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1909년 들어 신민회 수뇌부는 더 이상 국내에서는 국권회복운동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1909년 봄, 신민회 수뇌부가 계몽운동에 주력했던 노선을 무장투쟁으로 바꾸기로 논의했다.
이 논의가 본격화한 건 1910년 3월이었다. 신민회 수뇌부가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국외에 독립운동기지와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즉 청년들을 국외의 무관학교에 보내 사관 훈련을 받게 하고, 군대를 만들어 일본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를 위해 신민회는 간부들을 망명팀과 국내 잔류팀으로 나눴다. 한 팀은 국외로 망명해 이 사업을 담당하고, 다른 팀은 국내에 남아 자금을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1910년 4월 이갑, 안창호, 유동열, 이동휘, 김희선, 신채호, 이종호, 이종만, 김지간 등 신민회 간부들이 은밀하게 망명길에 올랐다. 무사히 탈출해 중국 칭다오(靑島)에 모인 이들은 독립운동의 방법을 논의했다. 이들은 만주에 독립운동기지와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합의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하지만 도중에 한일병탄 소식을 들은 신민회 인사들은 땅을 치며 대성통곡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만주에 독립운동기지와 무관학교를 만들려는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자금을 내기로 했던 이종호가 무슨 이유에선지 약속을 번복한 것이다.
무관학교 설립계획이 무산되자 망명 인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신민회의 창설 주역이었던 유동열은 베이징(北京)으로, 이갑은 러시아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안창호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고 만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국외에 독립운동기지와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한 신민회의 계획은 다음 해에 실현된다. 1911년 5월 서간도 지린(吉林)성 류허(柳河)현에서 이회영 6형제, 이상룡, 김동삼 등 신민회 간부들이 교민 자치단체인 경학사(耕學社)와 무관학교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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