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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으면 반복되리 뼈에 새기듯 그린 역사

입력 2024. 05. 02   16:37
업데이트 2024. 05. 02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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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예술
옛 그림으로 떠나는 여행 ⑧이시눌, <임진전란도>


후대 동래부 관리들, 숨은 기록 찾아내
부산진성·다대포전투 지도처럼 한폭에
좌우 상단엔 순절한 정발·윤흥신 제단
의도따라 강조…육지 가까운 배는 크게
전멸한 조선군 그리지 않고 ‘순절비’로
‘정운함’으로 뜻 기린 정운 장군도 자리

 

이시눌 <임진전란도(壬辰戰亂圖)>. 1834년, 비단에 채색, 148×85.5cm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시눌 <임진전란도(壬辰戰亂圖)>. 1834년, 비단에 채색, 148×85.5cm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왜구가 침범했다. (중략) 적선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 정발(鄭撥·1553~1592)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정발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 이튿날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이 죽었으며, 그의 첩도 죽었다. (중략) 200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오직 밀양부사 박진과 우병사 김성일이 적을 진주에서 맞아 싸웠다.
-선조실록 26권(선조 25년 4월 13일 임인 1번째 기사)
지도 같은 그림이 펼쳐져 있다. 그림 맨 아래는 대마도(對馬島)라 표기했다. 대마도에서 양 갈래로 나뉘어 배가 이동한다. 한 갈래는 두송산을 거쳐 다대포로, 다른 한 줄기는 오륙도, 절영도를 거쳐 부산진성으로 들어가고 있다. 1만8000여 명의 왜군이 배 700여 척을 나눠 타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장면이다. 그림은 1592년 음력 4월 13일 시작한 임진왜란의 첫 번째 전투인 부산진성 전투와 두 번째 날의 다대포 전투를 그렸다.

배는 육지에 가까울수록 크게 그리고, 멀수록 작게 그렸다. 옛 그림은 그림 제작 의도에 따라 중요하면 크게 그리고, 한 공간에도 여러 시점이 교차할 수 있다. 성안 군사들이 본다면 육지에 가까울수록 큰 배로 보이는 게 당연하다.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징비록』에는 “왜적들이 타고 온 배가 대마도에서 부산포 앞에 이르는 바다를 가득 메워 그 끝이 보이질 않았다”고 기록했다.

부산진성 옆에는 자성대(子城臺)라고 적고 왜인 군막으로 표기했다. 원래 부산진성이 있던 자리로, 왜병이 성을 함락시킨 이후 성을 헐고 왜성을 쌓았다. 군막 안에는 여기에서 순절한 정발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추모하기 위한 비석이 보인다.

 

임진전란도 부분-부산진성.
임진전란도 부분-부산진성.

 

임진전란도 부분-다대포 몰운대.
임진전란도 부분-다대포 몰운대.



조선의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활을 쏘고 있다. 성 밖을 에워싼 왜군은 조총과 칼 등의 무기로 위협하고 있다. 그림에서는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부산진성 남문 성벽 앞에 ‘積如山倭屍三處(왜병의 시체가 세 곳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는 문구가 있다. 왜병은 아침부터 부산진성을 공격하고 두 시간 만에 성을 함락시켰다. 당시 부산진성을 지키던 조선군은 실제 거의 전멸했고, 왜군은 1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하지만 그림은 조선군의 희생을 순절비(殉節碑)로 대체했다.

경상 좌수사 박홍은 바로 성을 버리고 경주로 달아났다. 왜적이 군대를 나누어 서생포와 다대포를 함락시켰는데, 다대포 첨사 윤흥신이 대항해 싸우다가 죽으니 바닷가의 군현과 진보들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해 흩어졌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2번째 기사)

부산진성이 함락된 후 이어 다대포도 함락됐다. 그림 아래 다대포 근처 응봉(鷹峯)은 임진왜란을 알리는 봉수가 시작된 곳이다. 그림 위 왼쪽 황령봉에도 연이어 불이 올라 다급하게 전란을 알리고 있다. 이어 왜병은 중심부인 동래부(東萊府: 오늘날 부산 동래구)로 진격했다. “성은 협소했고, 왜병이 일시에 성으로 다투어 들어오니 성안이 메워져 움직일 수 없었다”는 기록은 그날의 참상을 짧게 전한다. 전쟁이 종결되는 1597년까지 이렇게 동래부는 왜군이 상주하는 적진이 됐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동래부에 부임하는 관리들은 이때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경계심이 무뎌지는 것을 조심했고, 숨은 기록을 찾았다.


임진전란도 부분-정운 장군.
임진전란도 부분-정운 장군.



<임진전란도>는 1834년 6월 동래부에서 주도해 군기감관 이시눌(李時訥)이 제작했다. 공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자들을 추모하고 그 흔적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그림 상단 양편에 있는 정공단(鄭公壇)과 윤공단(尹公壇)이 이 그림의 제작 목적을 말한다. 정공단은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당시 부산첨사 정발을 추모하는 기념물이며, 윤공단은 1765년 다대첨사 이해문(李海文)이 다대포에서 전사한 윤흥신(尹興信, ?~1592)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다대포 첨사 윤흥신과 전투에 참여한 백성들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에 통신사를 다녀왔던 조엄(趙?)이 기록을 찾고, 1772년 1월 영조에게 건의해서야 비로소 윤흥신을 동래부 충렬사에 모실 수 있었다.

그림의 맨 왼편 아래에는 ‘몰운대(沒雲臺)’라는 지명에 ‘녹만호운비(鹿萬戶運碑)’라고 적힌 비석이 그려져 있다. 그 앞으로 ‘녹도진선(鹿島鎭船)’이라고 적힌 배가 있고, 장군과 군사 두 명이 왜적을 맞이하고 있다. 주인공은 녹도만호 정운(鄭運, 1543~1592)과 휘하에 있던 부하 장수다. 정운 장군은 이순신 장군을 보필해 옥포해전과 한산대첩 등 중요한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이순신 장군이 가장 의지하고 아꼈던 인물로 『난중일기』에도 충의가 강하고, 용감한 인물로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부산포해전을 이겨 왜군에게 큰 타격을 줬으나, 정운 장군은 전사했다.

전란이 일어난 지 200여 년이 지났지만 정조 임금은 누구보다 이순신 장군과 전란에 공을 세운 역대 충신을 기억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정운 장군에게 충장(忠壯)이란 시호(諡號·공덕을 칭송하며 임금이 내린 이름)도 하사하며, 후손을 등용하고자 했다. 정운 장군의 8대손인 정혁(鄭爀)이 다대포에 첨사로 부임하면서, 정운의 유적비를 몰운대에 세웠다. 그리고 또 200여 년이 흘러 우리의 해군 잠수함 ‘정운함’ 이름에도 정신이 서려 있다. 이순신 장군은 정운을 추도하며 제문의 한 구절을 이렇게 지었다.

‘나라 위해 던진 몸, 죽어도 오히려 살았도다(爲國亡身 有死猶生).’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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