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현대 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루터 ‘면벌부’ 비판, 종교적 민족주의 바람 타고 활활

입력 2024. 05. 01   16:49
업데이트 2024. 05. 0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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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⑨ 16세기 프로테스탄티즘(상)

1517년 독일 교회에 내건 ‘95개조 논제’

활판인쇄술 발달로 유럽 전체 퍼지며 파장
교황에 이단자로 몰린 루터, 사생결단 대응
가톨릭-정교회 양분된 크리스트교 균열 내
신교파 ‘프로테스탄티즘’ 출현 이끌어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마르틴 루터 초상화. 출처=위키백과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마르틴 루터 초상화. 출처=위키백과



15세기 르네상스를 이어 16세기에 서양 근대화의 물꼬를 튼 또 다른 중요한 지성사적 사건은 바로 1517년의 종교개혁(Reformation)이었다. 르네상스가 주로 상층 계층의 의식 변화에 국한된 데 비해 종교개혁은 사회 전체 정신세계의 ‘판’을 바꿀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실제로 중세 1000년 동안 서유럽 사회를 호령해 온 로마 교황의 권위가 와해됨은 물론 가톨릭교회의 통일성이 타파돼 새로운 교파인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개신교)이 탄생했다. 그래서 미국의 저명한 지성사가(知性史家) 자크 바전은 자신의 책(『새벽에서 황혼까지 1500-2000』)에서 서양 근대 500년 역사를 4개의 연속된 혁명으로 설명하면서 첫 혁명으로 종교혁명(1500~1648)을 꼽고 있다. 우리 역시 인간 삶에서 지성보다 더 중요한 덕목으로 영성(靈性)을 강조하기도 한다.

역사적 대(大)사건인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가톨릭 절기인 만성절에 비텐베르크대 성서신학 교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가 대학 교회 정문에 내건 ‘95개조 논제(Ninety-Five Theses)’에서 발화(發火)됐다. 이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건축기금을 충당할 목적으로 당시 독일 지역에서 자행되던 ‘면벌부(免罰符·Indulgence: 흔히 면죄부로 알려져 있으나 면벌부로 번역하는 게 정확함)’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개인 의견서였다. 면벌부 구입으로 연옥에서 신음하는 부모·형제의 영혼이 천국으로 향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며 “근본적으로 교황과 사제에게는 죄 사면권이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이런 주장을 담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당시 발달한 활판인쇄술 덕분에 빠르게 퍼져 나가면서 독일 지역은 물론 유럽 전체가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520년 여름 교황은 칙서를 발간해 면벌부 판매를 비판한 루터를 이단자로 선언하고 그에게 이단을 철회할 것인지, 파문당할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60일 유예기간을 줬다. 하지만 루터는 교황의 칙서와 교회법을 함께 불태워 버리는 초강수로 대응했다. 이러한 루터의 사생결단식 행동은 결과적으로 1054년 이래 유럽 서쪽에 가톨릭교회, 동쪽에 그리스정교회(동방교회)로 양분돼 있던 크리스트교 내에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불린 또 다른 교파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루터는 왜 로마 교황과 교황청의 허락하에 이뤄지고 있던 면벌부 판매행위를 비판했을까? 사태의 직접적 발단은 면벌부 판매였으나 그 이전에 가톨릭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이 중세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카노사 굴욕사건(1077)이나 십자군 원정(1095~1291) 등 굵직한 사건과 얽히면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점차 세속·권력화됐고, 당연히 물질을 매개로 한 부패가 뒤따랐다. 특히 중세 말에 이르면 성직 매매가 공공연하게 자행됐다. 그러다 보니 문맹자가 있을 정도로 무자격 성직자는 물론 담당 교구에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 부재 성직자도 속출했다.

교회법에 어긋나는 일도 뒷돈을 받고 허가해 주는 특면장 발부(發付)도 거리낌 없이 남발됐다. 게다가 어이없을 정도로 성(聖)유물 참배가 유행하고 희귀한 성유물 수집 붐이 일었다. 일반 성도들은 유럽 각지에 산재된 성지들을 순례하느라 경제적으로 고통받았고, 권력자나 부자는 성인의 유품이나 유골 등을 입수하려고 극성이었다. 당연히 도처에 성유물 전문거래꾼들이 들끓었고 가짜 물품이 속출했다.


마르틴 루터 동상이 세워져 있는 비텐베르크 시내 중심 광장. 출처=위키백과
마르틴 루터 동상이 세워져 있는 비텐베르크 시내 중심 광장. 출처=위키백과



면벌부 문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톨릭 신학에서 면벌이란 고해성사로 죄를 용서받은 뒤 교황의 권위에 의해 해당 죗값으로 이승과 연옥에서 받을 벌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면해 주는 것을 의미했다. 면벌부는 원래 11세기 말 십자군 원정 참여를 독려할 목적으로 창안됐다. 교황은 ‘은혜의 보물창고(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축적한 여분의 선행을 모아 놓은 창고)’에서 은혜를 꺼내 이를 신자에게 나눠 줄 수 있다는 믿음이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었다.

문제는 점차 그 적용 범위가 겉잡을 수없이 확대돼 급기야 교황이 이승에서는 물론 연옥에서 받을 형벌기간마저 단축할 수 있다는 해석까지 가능해진 점이다. 종교개혁 직전 교황청의 허락을 얻어 독일 지역에서 면벌부를 판매한 요한 테첼 수도사는 문맹의 신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독려했다. “당신을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와 친지들이 연옥의 불구덩이에서 울부짖고 있다. 당신은 작은 액수로 이들을 구할 수 있는데도 왜 하지 않는가? 그들은 당신의 도움을 기다린다.”

드넓은 유럽 땅에서, 하필이면 독일 중북부 지역에서 활동한 루터라는 인물이 왜 종교개혁에 불을 붙이는 주인공이 됐을까? 루터는 작센주(州) 튀링겐 지방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부친의 남다른 지원에 힘입어 당시 북독일 명문대학이던 에르푸르트대에서 공부했다. 17세에 에르푸르트대에 입학해 법학을 전공한 루터는 보장된 삶을 살길 바라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21세이던 1505년 돌연 회심한 후 에르푸르트 소재 아우구스티누스 교단 은둔 수도성직자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비범한 지적 능력을 발휘한 루터는 주임 수도원장의 눈에 들어 1508년 비텐베르크대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됐다. 1512년 신학박사 학위를 마친 루터는 모교에서 성서신학을 강의하면서 일상의 삶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비텐베르크에서도 면벌부가 판매되고 있음을 알게 됐다. 대학의 명망 있는 신학교수로서 평소에도 성경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쳐 온 루터로서는 이러한 행태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원래 그는 성격도 불같지 않았던가!

이러한 루터의 반발이 광야의 고독한 외침으로 끝나지 않고 독일 중북부 지역 권력자와 민중에게까지 호소력을 발휘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답을 찾기 위해선 당시 독일인 사이에서 로마 교황청에 대한 불만이 쌓여 온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탈리아인인 교황이 독일 지역 교회 문제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도 불합리한데, 이에 더해 자신들이 낸 거액의 종교세가 고스란히 로마 교황청 금고로 들어가 사치스러운 행사 및 성당 치장비용으로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합리한 현실에 분노한 독일인은 로마 교황청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길 갈망하면서 누군가가 나서 자신들의 응어리진 울분을 토해 낼 기회를 마련해 주길 고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의 주장이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 붐을 타고 팸플릿으로 제작돼 빠르게 독일인들에게 전해졌다.

유럽의 외진 곳에서 활동한 한 신학 교수가 그은 성냥불이 당시 팽배한 ‘종교적 민족주의(Religious Nationalism)’라는 거센 바람을 타고 긴 세월 바싹 메말라 온 유럽인의 정신세계를 삽시간에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모진 훼방에도 저항의 불씨를 꺼지지 않게 만든 루터의 신앙 원리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관한 답변은 다음 회에서 이어진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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