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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6·25전쟁영웅, 5월의 독립운동가

입력 2024. 04. 30   15:51
업데이트 2024. 04. 30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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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강원도 인제 812고지 전투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진지를 사수했던 윤길병 육군소령(당시 대위)이 ‘2024년 5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됐다. 

‘2024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채찬(1962년 독립장)·김창균(1995년 독립장)·장창헌(1995년 애국장)·이춘화(1995년 애국장) 선생이 선정됐다.

윤길병 육군소령
윤길병 육군소령


5월의 6·25전쟁영웅 윤길병 육군소령(당시 대위)
항복 강요에도 마지막까지 진지 사수
교사로 근무하다 육군 자원입대
적에 맞서 812고지서 백병전 펼쳐

‘5월의 6·25전쟁영웅’ 윤길병 육군소령은 경상북도 경주시 출생(1931년)이다.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경주 건천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에 자원입대,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1951년 1월 20일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국군 6사단 2연대 소대장으로 배속돼 사창리전투(강원도 화천군), 용문산전투(경기도 양평군)에 참전해 공훈을 세웠다. 

1953년 1월 30일 국군 12사단 3대대 10중대장으로 부임한 그는 정전협정 체결을 목전에 둔 1953년 6월 강원도 인제군에 펼쳐진 중동부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사단의 방어선은 인제로 향하는 주요 접근로인 서화리 계곡을 내려다보는 곳이었다. 북한군이 방어선 주변 고지대를 차지하고 있어 주저항선이 항상 적에게 노출되는 악조건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지점인 812고지를 지켜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1953년 6월 1일 북한군 45사단이 812고지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자 37연대장 김재명 대령은 고지 정상을 지키던 3대대에 “여하한 어려움도 극복하고 현 주저항선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대대원들은 이미 812고지 일대에 배치돼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북한군의 공격은 812고지의 우일선에 있는 10중대 진지에 집중돼 윤 소령은 중대원들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무명고지를 둘러싼 10중대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812고지를 사수하던 국군 상황은 점차 불리해졌고, 고지 정상을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1953년 6월 5일, 북한군은 812고지 우측의 무명고지에 2개 중대를 투입했다. 고지를 사수하던 10중대는 적의 파상공세에 맞서 격전을 벌였지만, 북한군이 추가 병력을 투입하면서 중대 방어선이 고지 정상 부근까지 물러서게 됐다.

윤 소령은 생사를 초월한 채 마지막까지 화력을 퍼부었지만 적에게 포위돼 부대원을 이끌고 동굴 진지로 들어가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적의 항복 강요를 거부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진지를 사수하던 그는 결국 전사했다. 정부는 윤 소령의 공적을 기려 화랑무공훈장(1951년) 수여와 1계급 특진, 충무무공훈장(1953년)을 추서했다.



채찬 선생
채찬 선생

 

5월의 독립운동가 채찬·김창균·장창헌·이춘화 선생

사이토 총독 저격·주요기관 파괴
무장투쟁 통해 조국독립 헌신

임시정부 참의부 독립군으로 맹활약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채찬·김창균·장창헌·이춘화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부대(1924년 설립)인 참의부 독립군으로 활약했다. 참의부 독립군들은 사이토 총독 저격뿐만 아니라 남만주 일대의 항일운동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수많은 무장투쟁을 통해 적에게 큰 피해를 줬으며, 국경을 넘어 일제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고 밀정을 처단하는 등 치열한 독립투쟁을 수행했다.

충북 충주 출생(연도 미상)인 채찬 선생은 일찍부터 의병투쟁을 하다 만주로 이동해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했다. 이후 서로군정서, 통의부 등에서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독립신문에 자금을 지원해 독립정신을 고취하도록 노력했다.

평안북도 창성 출생(1899년)인 김창균 선생은 의병장들이 주도해 결성한 대한독립단에 가입, 일제와 교전을 벌이고 밀정 처단에 앞장섰다. 1922년에는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 결성한 통의부에 참여해 일제 경찰대와 교전하고 일제 기관을 습격하는 등 적에게 큰 피해를 줬다.

평안북도 용천 출생(1884년)인 장창헌 선생과 평안남도 대동 출생(1896년)인 이춘화 선생은 일찍부터 대한통의부 의용군에 참여해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1924년에는 친일파를 사살하고 가옥을 소각하는 등 무장투쟁을 벌이다 일제와 교전 중 순국했다.

특히 1924년 5월 19일 문화통치로 한국인을 분열시킨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압록강 상류에서 신의주를 향해 국경을 시찰한다는 정보를 들은 참의부 참의장 채찬은 총독 사살을 명령했다. 김창균?장창헌?이춘화 선생은 매복하고 있다가 순시선을 향해 일제히 사격했다.

참의부의 저격 사건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사이토 총독은 그 해 열린 일본 국회에서 조선 통치의 성과 보고도 하지 못하고 저격 사건 상황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해야 했다. 또한 독립신문을 비롯한 다수 언론에 해당 사건이 대서특필돼 한민족의 항일의식을 크게 고무시키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채찬?김창균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장창헌?이춘화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글=송시연 기자/사진=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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