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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해져봐 그게 너야

입력 2024. 04. 29   17:14
업데이트 2024. 04. 2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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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뮤·클 이야기 - 뮤지컬 '더 트라이브'

커밍아웃 주저하는 조셉…영화감독 데뷔 좌절되는 끌로이

고대 유물 깬 뒤 거짓말 할 때마다 노래하고 춤추는 부족 보여
황당한 설정이지만 ‘속에 없는 말’로 채워진 우리 삶 실감케 해
가볍지만 강한 울림 “스스로 내 편이 돼주면 날 찾을 수 있어”

 

뮤지컬 ‘더 트라이브’의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제공
뮤지컬 ‘더 트라이브’의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제공

 

 

사회 초년병 시절. 우리 부장님은 이른바 고기, 그것도 값비싼 등심 마니아였다. 전생에 단식원에서 풀만 먹다 죽었는지 부서 회식메뉴는 열에 일고여덟은 등심구이였고, 외부 손님 접대도 등심구이, 누군가 한턱을 내러 와도 등심구이였다. 직장 근처에는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등심구이집들이 있었기에 나는 부장님 덕에 말단직원 월급으로는 쳐다보기도 어려운 등심을 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몇 달 지나니 슬슬 물려왔다. 어느 순간부터 등심이 전처럼 맛있게 느껴지지 않더니 급기야 육신이 등심을 거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안에서 먹고(회식), 밖에서 먹고(외부접대), 3일 연속 점심과 저녁에 등심을 먹다 보니 결국 “부장님, 저 도저히 등심 못 먹겠습니다(살려주세요)”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이날의 애절한 토로 덕에 한동안 등심 대신 다른 메뉴를 얻어먹을 수 있었지만, 대신 선배들로부터 “라떼는 말이야. 김치찌개에 돼지고기만 들어가도 로또 맞은 날이었다” 같은 소리를 지금까지 들으며 놀림을 받고 있다.

호랑이 전자담배 피던 시절의 얘기를 이처럼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이유는 공연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심각하고 무거운 작품만 연달아 관극하다 보니 머릿속을 비우고 가볍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작품 생각이 간절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뮤지컬 ‘더 트라이브(THE TRIBE)’는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러닝타임도 2시간이 되지 않는 데다 주요 배경이 박물관이라 어린 관객들이 보기에도 괜찮다. 요즘 은근 재밌는 작품들을 다수 선보이고 있는 서울시뮤지컬단(단장 김덕희)이 만들었다.

프랑스 파리가 배경이고 등장인물 이름도 조셉, 끌로이, 아이샤, 오드리 식이지만 의외로 순수 국산 창작 뮤지컬이다.

뮤지컬 ‘더 트라이브’의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제공
뮤지컬 ‘더 트라이브’의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제공



박물관에서 일하는 유물 복원가 조셉과 프리랜서 작가 끌로이가 주인공.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조셉은 ‘커밍아웃’을 할 엄두도 못낸 채 어머니의 강요에 억지 소개팅을 하러 다닌다. 끌로이는 멋진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고 싶어 하지만 “러브라인을 넣어라” “액션장면을 늘려라”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스폰서에 시달리는 한편 연달아 계약에 실패해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다. 소개팅에서 만난 두 사람은 조셉이 일하는 박물관을 방문하게 되고, 실수로 고대 부족(TRIBE)의 유물을 깨뜨리면서 본격적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이 작품에는 꽤 흥미로운 설정이 있는데, 그것은 조셉과 끌로이가 거짓말, 속에 없는 말을 할 때마다 두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고대부족이 느닷없이 나타나 (마치 인도영화처럼) 신나는 아프리카 리듬에 맞춰 떼춤을 춘다는 것. 황당하다 못해 헛웃음이 날 지경인 설정이지만 이게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뮤지컬 ‘더 트라이브’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제공
뮤지컬 ‘더 트라이브’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제공


가볍게 볼 수 있는 작품이지만 뱃속의 메시지는 건강한 울림을 갖고 있다. ‘나다움’을 찾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괜찮다. 스스로가 든든한 나의 편이 돼준다면 언제든 나를 찾을 수 있다”고 속삭인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조셉과 끌로이가 보여주는 일상의 변화도 유쾌하기 그지없다. “나 살쪘지?” 하는 친구 앞에서 “너 살쪘어”라는 대답을 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끌로이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속에 없는 말’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아, 그렇다고 이 뮤지컬이 “나 앞머리 자를까? 말까?” 묻는 아내에게 “알아서 해”라고 답하라는 무시무시한 얘기는 아니다. 유쾌하면서도 지혜로운 부족과 신나게 춤추고 웃으며, 우리 삶의 해피엔딩을 꿈꾸며 살자는 것. 이 뮤지컬이 진짜 하고 싶은 얘기다.

어딘지 ‘엽기적인 그녀’의 차태현을 떠올리게 하는 김범준의 ‘조셉’과 불문곡직 응원하고 싶어지는 청춘 김이후 ‘끌로이’의 조합이 극을 부드럽게 끌고 간다. 두 주인공 못지않게 눈이 간 캐릭터는 조셉에게 한눈에 반해버리는 소개팅녀 ‘오드리’로 조희수의 연기는 박수를 받을 만했다. 최근 뮤지컬 ‘컴프롬어웨이’에서 보았던 김아영도 반갑다. 엉뚱하면서도 유쾌하고 지혜로운 조셉의 할머니 ‘아이샤’를 맡아 극에 맛깔난 MSG를 딱 적당하게 뿌렸다.

서울시뮤지컬단의 안마당과 같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 중. 5월 5일 어린이날이 막공이니 조금 서둘러야 한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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