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대한제국의 군인들

군대 해산 앞장선 친일 군인, 한일병탄 후 부귀영화

입력 2024. 04. 22   15:56
업데이트 2024. 04. 2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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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군인들 - 41. 대한제국 멸망과 지배계급의 변신 

나라 잃었지만 왕실·지배층 가문 유지
이완용·송병준 등 친일파 대신들 득세
개화파 김윤식·박영효도 작위·은사금
일본 육사 출신은 일본군과 똑같은 대우
이병무·조성근·어담 등 중장까지 진급
김관현·박영철 두 차례씩 도지사 지내

고종(왼쪽)과 순종 황제. 출처=위키백과
고종(왼쪽)과 순종 황제. 출처=위키백과



1910년 8월 22일, 일본제국과 대한제국 간의 병탄조약이 조인됐다. 그런데도 대한제국과 일본 정부는 1주일 뒤인 8월 29일 이 사실을 발표했다.

청나라의 유명한 학자이며 정치가인 량치차오(양계초·梁啓超)의 주장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대한제국 정부가 8월 27일 순종의 황제 즉위 3주년 기념행사를 치른 후 병탄 사실을 발표하자고 일본 정부에 부탁했다’는 것이다. 순종은 1907년 8월 27일 덕수궁 돈덕전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바 있다. 량치차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놀라다 못해 기절할 일이다.

량치차오는 순종 즉위 3주년 기념식장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날 대연회에 신하들이 몰려들어 평상시처럼 즐겼으며, 일본인 통감 역시 외국 사신 예에 따라 그들 사이에서 축하하고 기뻐했다. 세계 각국의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은 대한제국 군신들의 달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량치차오는 또한 대한제국 멸망의 원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조선을 망하게 한 자는 최초에는 중국인이었고, 이어서 러시아인이었으며, 최종적으로 일본인이었다. 그렇지만 중·러·일인이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스스로 망한 것이다.’

8월 29일,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이 국내외에 발표됐다. 이와 함께 순종 황제는 창덕궁 이왕(李王), 고종 태황제는 덕수궁 이태왕(李太王)으로 책봉됐다. 황실에서 왕가로 격하된 것이다. 비록 신분이 격하됐지만, 이왕가(李王家)는 조선의 왕공족(王公族)으로서 작위를 세습하는 특권을 받았다.

여기서 말하는 왕공족은 원래 일본에는 없는 호칭이었다. 이왕가를 위해 만들어진 호칭이었다. 일본은 궁내성(宮內省) 소속으로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구를 설치해 왕가(王家)와 공가(公家)의 관련 사무를 담당하게 했다. 이왕가는 조선총독부가 정한 특별회계에 따라 권위를 유지하는 데 충분한 세비를 받았다.

 

1915년 9~10월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가 열렸다. 근정전 앞에 게양된 일장기가 국권 상실을 상징한다. 출처=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
1915년 9~10월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가 열렸다. 근정전 앞에 게양된 일장기가 국권 상실을 상징한다. 출처=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



왕실만이 아니었다. 이완용과 송병준 등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 대신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爵位)를 받고 조선 귀족이 됐다. 이들은 조선총독부가 설치한 중추원(中樞院) 구성원이 돼 부귀영화를 누렸다.

중추원은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이었다. 실제 권한이 전혀 없는 유명무실한 기관이었지만, 일본의 식민 통치에 협력한 거물급 친일파의 집결소였다. 박영효와 윤치호 등 진짜 거물급은 일본 제국의회의 중의원(하원) 의원과 귀족원(상원) 칙선의원(勅選議員·일왕이 직접 임명하는 의원)에 임명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나라는 일본에 내줬지만, 왕실과 지배층은 가문을 유지한 것이다. 일본은 왕실과 지배층은 물론 유력 양반들의 신분과 재산을 보장해 식민지 통치에 이용했다.

그렇다면 개화를 주장한 개화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온건개화파였던 김윤식과 급진개화파였던 박영효, 두 사람의 행적을 살펴본다.

개화파의 맏형 격인 김윤식(1835~1922)은 일본으로부터 자작(子爵) 작위와 은사금 공채(恩賜金公債) 5만 원을 받았다.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다가 받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참담하다. 고종과 순종이 각각 ‘과인은 이미 작위를 받았음에도 경이 이를 받지 않으니 심히 불안하다’는 교지를 보내 할 수 없이 받았다는 것이다. 한때 황제였던 사람들이 과거의 신하에게 할 소리인지 귀를 의심할 얘기지 않은가. 

이후 김윤식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두문불출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을 요구하는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총독부에 제출해 징역형을 선고받고 작위를 박탈당했다. 1922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박영효. 출처=두산백과
박영효. 출처=두산백과



박영효(1861~1939)는 후작(侯爵) 작위와 은사금 공채 28만 원을 받았다. 작위를 받은 자들로 조직된 조선귀족회(朝鮮貴族會) 회장과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역임했다. 1932년에는 조선인 처음으로 일본제국 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이 돼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1935년에는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에 수록됐다. 이 책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조선인 공로자 353명을 수록한 것이다. 1939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한편 대한제국군 해산에 앞장섰던 군부대신 이병무 등 일본 육사 출신인 친일 군인들도 부귀를 누렸다. 이병무를 비롯한 친일 군인들은 이름뿐인 군부(軍部, 1909년 친위부로 개칭)에서 자리를 지켰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탄돼 친위부(親衛府)마저 폐지되자 일본 조선군사령부부(朝鮮軍司令部附)가 돼 왕공족부 무관(王公族附武官)을 하거나 조선보병대의 고위 장교로 변신했다.

조선군사령부의 일본 육사 출신 조선인은 일본군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이병무·조성근·어담 등은 중장까지, 왕유식·이희두 등은 소장까지 진급했다. 김응선·김형섭·박두영 등은 대좌, 권승록·김기원 등은 중좌까지 진급했다.

김관현과 박영철은 1920년대 도지사를 각각 두 번이나 했다. 이후 박영철은 금융계와 실업계에 진출해 재계의 실력자가 됐다. 경찰 관리로 변신한 김봉석(김상설)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촉탁으로 근무했다.

일본 육군도야마학교 출신으로 갑신정변 때 일본으로 망명한 신응희와 이규완은 조선총독부 초대 도장관(道長官)이 됐고, 정난교는 부지사 격인 도참여관(道參與官)에 임명됐다.

이들은 관직에서 은퇴한 뒤에는 중추원 참의(參議)를 지냈다. 1935년 당시 중추원 칙임(勅任) 대우 참의 25명 가운데 조성근, 어담, 박영철, 김관현 4명이 있었고, 주임(奏任) 대우 참의로는 김봉석(김상설), 정난교 등이 있었다. 일제 말기에는 박두영도 참의에 임명됐다.

당시 일본 육군사관학교, 육군도야마학교 등에 유학한 사람들은 단순하게 군사학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선진문물을 접한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개화파와 일본 유학파, 이들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친일의 길을 걸었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황제를 비롯한 지도층이 무기력하게 일본에 나라를 넘겼으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켰다는 사실. 참으로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찌 그런 사람들만 있었겠는가. 수많은 애국지사와 지식인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항일투쟁을 벌인 것 또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무관 중에도 많은 사람이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군인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사라진 나라의 마지막 무관들. 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항일투쟁을 벌였는지 다음 회부터 살펴보겠다.

 

필자 김선덕은 32년간 국방일보 기자, 국군영화 감독, 국방TV PD로 봉직한 군사연구가. 현재 공군 역사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필자 김선덕은 32년간 국방일보 기자, 국군영화 감독, 국방TV PD로 봉직한 군사연구가. 현재 공군 역사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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