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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의 ‘펜 들고 세계 속으로’] 도깨비 분장 수병에 연행돼 물통에 갇히는 벌칙 받아

입력 2024. 04. 19   17:17
업데이트 2024. 04. 2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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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해군순항훈련 -괌과 적도제 

사랑하던 연인 떨어진 ‘사랑의 절벽’
일 패잔병 숨어 살던 ‘요코이 동굴’
섬 곳곳에 아픈 상처 간직한 전적지
적도 지나며 용왕께 무사 항해 기원제
유쾌한 단막극으로 함상 생활에 활력
죄목 따라 벌금·곤장…축제처럼 즐겨

적도제. 끝없는 망망대해에서 생도·승조원들의 단조로운 함상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일종의 축제다.
적도제. 끝없는 망망대해에서 생도·승조원들의 단조로운 함상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일종의 축제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올라갔던 순항함대는 다시 남하해 미국령 괌으로 함수를 돌렸다. 도중에 두 가지의 훈련을 했다. 하나는 군수지원함인 천지함에서 구축함인 광개토대왕함에 유류를 전달하는 해상유류보급훈련. 다른 하나는 사격훈련이다. 함정 끄트머리에 기다란 표적물을 달고 이를 맞혀 격침하는 것이다. 대공사격 시 항공기에 표적지를 늘어뜨린 것과 같이 생각하면 된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에서 함정이 이곳까지 투입됐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서 직선으로 200㎞ 정도(?)만 가면 포항이란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갑자기 울컥해진다. 불현듯 집 생각이 떠오르고 과연 항해 끝날 때까지 무사히 보낼 수 있을 것인가 걱정이 된다. 지금 그런 기회가 있으면 당장 지원할 텐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10월 31일 괌에 도착했다. 괌은 둘러보는 데 4시간이면 충분한 작은 섬이다. 그러나 섬 곳곳에는 세계대전의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전적지들이 많다.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탓에 스페인풍, 일본풍, 미국풍, 그리고 차모로인의 생활 모습까지 각기 다른 문화를 간직한 이색적인 볼거리가 눈길을 끈다.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이 투몬 만 북쪽의 ‘사랑의 절벽(Two Lovers Point)’. 지배층이던 스페인 장교에게 시집보내려던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한 추장 딸이 사랑하던 청년과 도망치다가 이곳에서 서로 머리를 묶고 떨어졌다는 곳으로 괌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자랑한다.

‘요코이 동굴’도 있다. 괌 최대의 폭포라는 탈로포포 폭포를 뒤로하고 조금만 정글 깊숙이 들어가면 나온다. 일본군 패잔병이던 요코이가 전쟁이 끝난 것을 모르고 28년간 여기서 숨어 살았다.

생도들과 함께 해양스포츠도 잠시 맛봤다. 그리고 이름은 잊었지만 그때 제트스키를 같이 탔던 생도에게 이제야 미안함을 전한다. 당시 제트스키는 2인 1조로 탔다. 번갈아 가며 조종간을 잡았고, 현지인 사진사가 그 모습을 현상해 판매했다. 그런데 가지고 온 사진 2장 중 내가 조종간을 잡은 모습이 영 아니다 싶어 뒤에 탄 사진을 선택했다. 그 생도는 자기가 앞에 탄 장면을 갖고 싶었을 텐데.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다. 성숙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이여.



지친 항해에 시원스런 생명수

“유세차 단기 4335년 임오년 11월 7일 동방해동국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 제57기 순항훈련함대 천지함이 적도를 통과하며 용왕님께 제를 올리오니….”

괌을 떠나 타히티로 순조롭게 항해 중인 순항훈련함대는 7일 적도를 통과하며 세계 해양인들의 고유 통과의례인 적도제를 지냈다.

이 행사는 적도를 지나는 이들 가운데 착한 사람들에게는 상을, 악한 사람들에게는 징벌을 내리며 서로가 웃고 즐기고 항해의 지루함을 달래는 일종의 축제다. 특히 이번 적도제는 순항함대의 항해 중 가장 긴 13일간(항해 기간은 12일이지만 날짜 변경선 통과로 실제로는 13일)의 일정 중에 열려 더욱 의미가 있었다. 끝없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생도·승조원들의 단조로운 함상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생명수 같은 역할을 해 준 것이다.

적도제는 오후 6시30분 천지함 비행 갑판에서 사령관을 비롯한 참모진과 승조원·생도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적도제 유래에 대한 발표로 시작됐다. 천지함 주임원사가 제문을 낭독한 뒤 사령관과 생도 실습 대장·참모장·천지함장 등이 차례로 나와 장병들이 정성껏 마련한 제상에 헌량배례를 올리며 21세기 국운 상승과 무사 항해를 기원했다.

이어 적도제의 하이라이트인 단막극 공연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용왕과 신하·간신·시녀, 도깨비 등으로 분장한 수병들이 등장하면서 이날 행사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용왕: “짐이 심기가 불편해 마누라가 사 온 옥돌 매트에서 좀 쉬려는데 어인 연고로 이리 소란을 피우는고?”

신하: “예,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 57기 생도들이 천지함에 승조해 9개국 순항훈련 중 적도를 통과 중인데 이들 순항훈련함대 예하에 용궁 어족을 못살게 하는 죄질이 고약한 자들이 있사오니 이들을 그냥 통과시켜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신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왕은 죄인들을 잡아들일 것을 명했고, 부장을 시작으로 의무참모·보수관·훈육관·작전참모·조리장 등이 도깨비들에게 차례로 끌려 나왔다. 용왕 앞에 불려 나온 간부들은 그 죄목에 따라 벌금을 내고 곤장을 맞는 등 곤욕을 치러야 했다. 참석자들은 그때마다 너나 할 것 없이 폭소를 터뜨리며 즐거워했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갑자기 내가 불린 것이다. “승조원들은 바쁘게 일하는데 취재한다는 핑계로 방송작가와 열심히 싸돌아다닌다”는 죄목이었다. 반항은 꿈도 못 꿀 일. 힘없는 기자는 도깨비에게 연행됐다. 그리고 내려진 용왕의 판결. “작가는 노래 부르고, 그동안 기자는 물통에 처박혀 있도록 하라.”

예전 김장할 때 사용하던 커다란 플라스틱 파란 물통이 갇혀 있어야 할 장소. 물이 가득 차 있다. 도깨비들은 인정사정없었다. 물통에 집어넣더니 뚜껑까지 덮는다. 물과 뚜껑까지 거리는 불과 1~2cm.

나도 모르게 말이 험하게 나온다.

“야, 숨은 쉬게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 안에서 수중 호흡을 익히고 인내를 배웠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무사한 장교들이 있었으니 사령관과 참모장, 함장이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하는 법인데. 예외를 두다니. 우연찮게 비리의 현장(?)을 포착한 셈이다.

적도제는 계속 진행됐다. 벌칙 사이사이에 어우동으로 분장한 수병이 지휘부에 꽃을 팔고 신하들이 코믹 율동을 추는 등 갖가지 재미있는 모습들을 연출함으로써 참석자들의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령관이 용왕으로부터 ‘적도 통과증’을 받음으로써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남국 태평양 한가운데서 펼쳐진 그날의 적도제를 또 경험해 보고 싶다. 단 내가 벌칙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괌에서 가장 큰 탈로포포 폭포.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일본군 패잔병이던 요코이가 전쟁이 끝난 것을 모르고 28년간 숨어 살았던 동굴이 나온다.
괌에서 가장 큰 탈로포포 폭포.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일본군 패잔병이던 요코이가 전쟁이 끝난 것을 모르고 28년간 숨어 살았던 동굴이 나온다.

 

날짜 변경선 통과증.
날짜 변경선 통과증.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괌으로 가던 중 천지함에서 광개토대왕함으로 유류를 보급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괌으로 가던 중 천지함에서 광개토대왕함으로 유류를 보급하고 있다.

 

이주형 기자는 1995년 국방일보에 입사해 10여 회에 걸쳐 해외파병부대를 취재하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국군의 활약상을 보도했다. 현재는 대통령실 출입기자로 있다.
이주형 기자는 1995년 국방일보에 입사해 10여 회에 걸쳐 해외파병부대를 취재하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국군의 활약상을 보도했다. 현재는 대통령실 출입기자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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