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좋은 새가 깃들 가지를 구했으나…달빛에 전한 슬픈 안부만 남았네

입력 2024. 04. 18   15:22
업데이트 2024. 04. 1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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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그때 그곳 - 운강대 

황진이·허난설헌과 3대 여류시인 꼽히는 이숙원 
서녀 신분…승지 운강 조원의 소실로 들어갔지만
송사 관여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채로 세상 떠나

서울 경복고 내 운강대 석비·효자비 
효자동이라 이름 붙은 유래이기도

 

경복고 운강대 효자비. 필자 제공
경복고 운강대 효자비. 필자 제공


서울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등학교 유서 깊은 교사 입구 화단에 ‘운강대(雲江臺)’라고 각인된 석비와 효자비가 보인다. 조선 중기 승지를 지낸 운강 조원(1544~1595)이 이 공간에 살았음을 나타내는 흔적들이다. 운강의 두 아들 희정과 희철이 임진왜란 와중에 모친을 지키려다 왜군에게 목숨을 잃자 조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운강의 집을 ‘쌍효자가’로 지정하면서 효자동이라는 동명이 유래했다(『서울지명사전』). 

이곳을 그냥 지나치기 어렵게 만드는 주인공은 따로 있다. 다름 아닌 조원의 소실 옥봉 이숙원이다.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3대 여류시인’으로 꼽히는 이다. 옥봉은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 이제의 5대 손녀로서 충남의 3남 통정대부이던 옥천군수 이봉의 셋째 서녀로 태어났다. 시집갈 나이가 되자 서녀 신분이라 정실로 갈 수 없어 소실 자리를 물색하던 중 조원과 맺어졌다.

부친에게서 글을 배워 글솜씨가 빼어났던 옥봉이 1564년 필명을 날리던 조원을 낙점했다는 비화가 임천조씨(林川曺氏) 문중에 전해 내려온다. 옥봉의 부친 이봉이 운강의 장인 이준민을 찾아가 허락을 구했고, 장인이 사위에게 옥봉을 소실로 취할 것을 권하는 과정을 거쳤다. 구보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문재(文才)에 대한 옥봉의 자부심을 짐작한다. “좋은 새가 깃들 가지를 고른 것”(조성기·조원 증손)에 다름 아니었다. 운강은 남명 조식(1501~1572) 집안으로 선조 5년인 1564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해 1575년 정언(正言)이 됐으나 당쟁혁파 주장으로 좌천돼 이조좌랑과 괴산·삼척·성주 등의 외직을 돌다 1593년 승지에 올랐다.

운강은 옥봉의 글솜씨를 자랑스럽게 여겨 친구들과의 시회 자리에 동석시켜 글을 짓게 하곤 했다. 행복한 시간은 잠깐이었을 뿐, 일생일대 복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양 살던 지인의 남편이 소도둑으로 관에 잡혀가자 억울함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대필해 준 게 화근이 됐다. 파주목 윤국형에게 전달된 옥봉의 문장 ‘위인송원(爲人訟寃)’은 절묘했다.

“(전략)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닐진대/ 낭군인들 어찌 견우이겠소”(『시학대성(詩學大成)』).

‘견우와 직녀’의 설화를 인용해 ‘내가 (베 짜는) 직녀가 아닌데 남편이 어찌 견우(소몰이꾼)가 될 수 있겠느냐’는 해학적 청원이었다. 어려운 이를 도우려는 선한 마음의 발로였지만, 이 일이 화제가 되면서 옥봉이 노출됐고, 입장이 곤란해진 운강은 ‘송사에 관여했다’ 하여 옥봉을 내쫓는다. 소박을 맞은 옥봉에게 운강대로 다시 돌아올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의 병을 앓다 임진왜란 와중에 30대 후반의 나이로 숨졌는데 죽어서도 신화를 남겼다.

이수광이 『지봉유설』에 쓰기로는, 조원의 아들로서 승지이던 조희일(1575~1638)이 명의 사신을 만난 자리에서 시집 한 권을 받았는데 옥봉의 시집이었고, 사연을 들어 보니 “40년 전 절강성 용만(龍彎) 해안에 온몸을 종이로 감은 사체가 발견됐는데 빼곡한 시들과 함께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부실(副室) 이옥봉’이 적혀 있었다”는 것이었다.


파주에 있는 옥봉 이숙원 묘. 조원과 정부인의 묘 아래에 있다. 필자 제공
파주에 있는 옥봉 이숙원 묘. 조원과 정부인의 묘 아래에 있다. 필자 제공


이후 청의 전겸익(錢謙益·1582~1664)이 1652년 명대의 시들을 실은 『열조시집(列朝詩集)』을 내면서 옥봉과 허난설헌 등을 포함시켰다(『강한집』, 황경원). 구보는 일개 소실의 시가 명나라에까지 알려진 과정을 쉬이 짐작하지 못하는 까닭에 ‘시로 염을 한 옥봉이 배에 실려 중국에 닿았다’는 설을 사실로 믿고 싶어졌다. 

옥봉이 남긴 시는 모두 32편인데 숙종 30년인 1704년 조원의 후손인 조정만(1656~1739)이 조원과 조희일, 조석형 등 문중 3대의 글을 묶은 『가림세고(嘉林世稿)』 말미에 부록으로 실음으로써 오늘에 전한다. 이 조씨 삼대는 글이 출중해 선조대에 과거에 급제하고 왕으로부터 칭찬받은 공통점이 있다. 구보는 그 자신도 중추부지사를 지낸 조정만이 내로라했던 선조들의 문장 351편과 함께 증조부의 소박당한 소실의 글을 실은 것은 그 문장력이 빼어났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옥봉의 시들은 1918년 장지연이 우리나라 역대 시를 시대순으로 엮은 『대동시선(大東詩選)』에도 수록돼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약속해 놓고 왜 아니 오시는지요/ 뜰 앞의 매화나무 꽃이 지는데
가지 끝 까치 울음 터뜨리니/ 부질없이 거울 보며 눈썹 단장하네” - ‘규정(閨情, 아내의 정)’ 
“잘 지내시는지요 안부 여쭙습니다/ 달빛이 창에 어리면 첩의 슬픔은 더욱 짙어집니다 
꿈속에도 발자국이 남는다면/ 그대 집 앞 돌길은 모래가 다 됐을 겁니다” - ‘자술(自述)’ 
“님 떠난 내일 밤이야 짧든 말든/ 님 모신 오늘 밤은 길고 오래였으면 
새벽닭 홰치는 소리 들려오니/ 두 눈에선 천 가닥 눈물이 흐르네” ? ‘별한(別恨)’ 

‘자술’은 ‘몽혼(夢魂)’이라는 제목으로 더 알려졌다. 구보는 옥봉이 조원의 적자에게 써준 시, “네가 붓을 들면 바람이 놀라고 내가 시를 지으면 귀신이 운다네”에서 옥봉의 천재적 시재(詩才)와 함께 높은 자부심을 엿본다. 옥봉이 단종 애사가 어린 청령포를 지나면서 “이 몸 또한 왕손의 딸이라/ 이곳의 두견 소린 차마 듣지 못할레라”라고 읊은 ‘영월도중’ 구절을 두고 허균(1569~1618)은 『학산초담』에서 “여인의 꾸밈이나 분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칭찬했다. 신흠(1566~1628)은 “강은 넓디넓은 갈매기의 꿈을 적시고 하늘은 기나긴 기러기의 수심을 들여 앉혔네”란 구절에 탄복했고, 홍만종(1643~1725)은 “만당(晩唐)의 조격(調格)이 있다”고 칭찬했다. ‘두목과 이상은, 온정균 등이 대표하던 당나라 후기의 품격을 보인다’는 평가였다.

구보는 3월 경기도 파주 용미리의 임천 조씨 문중 묘를 찾아 조원 부부의 쌍분 아래 마련된 옥봉 이숙원의 묘에 헌화했다. 성리학의 조선은 하늘이 내린 ‘좋은 새’를 품기에는 품이 좁았다고 여기며 그녀의 넋을 달랬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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