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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중심은 나”…사상·예술에 개성·본능 불어넣어

입력 2024. 04. 17   16:15
업데이트 2024. 04. 17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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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양 근대사상의 뿌리 -르네상스 휴머니즘(하)
‘신곡’ 연인에 대한 사랑·‘데카메론’ 성적 본능 적나라하게 묘사
그림·조각, 명암·원근법·해부학적 기법으로 개성 마음껏 표출
인간 본성 관찰한 마키아벨리 통해 정치학도 독립된 학문으로
16세기 들어 유럽 북부로 중심 이동…저변 넓어지며 근대 개막

 

르네상스 시대 화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5년 작). 출처=위키피디아
르네상스 시대 화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5년 작). 출처=위키피디아


르네상스의 근본 이념은 ‘휴머니즘(Humanism)’이고, 이는 중세 1000년을 훌쩍 뛰어넘어 그리스·로마시대 고전문명과 연결돼 있음을 앞선 글에서 살펴봤다. 더구나 휴머니즘 발현에 힘입어 서양에서 ‘개인주의(Individualism)’ 사상이 피어나고, 그로부터 개인의 자유롭고 비판적인 정신 및 합리적 사고가 흘러나와 이후 서양사회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사회로, 사회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산업사회의 길로 나아갔음도 이해했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르네상스 시기에 휴머니즘이 재생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번 글에선 이러한 의문에 관한 답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한 사상가와 예술가의 활동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르네상스의 중심 개념이 ‘휴머니즘’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르네상스 개인주의는 중세 보편주의가 추구한 통일성 지향의 사회질서 속에서 일개 부품처럼 폄하돼 온 개인의 존재 가치를 적극 평가하고 모든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을 지향했다. 더불어 현실의 삶 속에서 자유롭게 개인 능력을 발휘해 인간으로서 자신감을 높이고자 했다. 이러한 르네상스 개인주의는 예술 분야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표출됐는데, 이때 작품에 묘사된 ‘인간의 발견’은 다름 아닌 ‘개인의 발견’이었다. 조반니 피코 델라미란돌라는 1486년 발표한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에서 “우주의 중심은 바로 인간인 나”라고까지 선언했다.

총칭해 ‘휴머니스트(Humanist)’라고 불린 당시 학자와 예술가 등 지성인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한껏 펼쳤다. 문학의 경우 페트라르카가 근대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히자 뒤이어 단테가 『신곡』에서 신(神)을 향한 사랑과 더불어 연인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도 표현했다. 특히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인간의 성적(性的) 본능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육체를 죄악시한 기성 교회와 봉건질서에 맞섰다. 


<p>이탈리아 철학자 조반니 피코 델라미란돌라. 출처=위키피디아</p>

이탈리아 철학자 조반니 피코 델라미란돌라. 출처=위키피디아

인간의 개성이 가장 실감 나게 표현된 곳은 아마도 미술, 조각 등 예술 분야일 것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서막을 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필두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 명화(名?)들 속에는 각자 개성을 과시하는 인간 또는 인간 군상이 화폭의 중앙을 채우고 있다. 명암법, 원근법, 인체해부학적 기법 등을 창안하고 적용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무엇보다 그림 속 등장인물의 개성과 심리상태를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도나텔로의 ‘청동상’이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그 재질이 차가운 쇠나 돌임에도 마치 주인공이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사실적이다.

중세 예술가들의 목표는 ‘창조주’를 찬미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멋진 그림일지라도 감상자에게 신실함을 전달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모든 것은 신과 신의 전능함을 드러내고 입증해야만 했다. 그런데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예술가들은 인간의 육체를 혐오가 아닌 고상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러하기에 인내심을 갖고 탐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예술 활동의 목표는 최고의 미(美)와 사실성을 합치시키는 데 있었다. 화가는 인간의 육체를 면밀하게 관찰해 인물의 행동과 표정을 주제에 어울리게 표현함으로써 인간성을 부여했다. 대표적으로 화가 라파엘로는 바티칸 성당 벽에 그린 ‘아테네 학당’에서 무려 50명에 달하는 등장인물 개개인에게 어울리는 개성을 불어넣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학문세계에도 반영돼 정치학 분야 고전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1513)을 탄생시켰다. 여기서 그는 정치적 고려와 도덕적 가치 간에 충돌이 생겼을 때 전자를 우위에 두라는 이른바 ‘마키아벨리즘’을 제시했다. 인간 본성을 면밀히 탐구한 마키아벨리는 인간에게 진정한 신의(信義) 같은 것은 없다고 전제했다. 바야흐로 정치적 행위가 윤리학·신학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정치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명함을 내밀 수 있었다.

이탈리아 시인 단테. 출처=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시인 단테. 출처=위키피디아

철학 분야에선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플레톤 같은 저명 학자들이 활약했다. 특히 이들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에 힘입어 1459년 피렌체에 플라톤학회를 창립하고, 이를 요람 삼아 플라톤 철학을 소개하고 재성찰을 시도했다. 덕분에 12세기 이래 서구 지성계를 지배해 온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가려져 있던 플라톤 철학이 ‘신플라톤주의’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일찍이 플라톤은 이데아가 본질이고, 그 외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봤으나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인간은 물론 물질에도 이데아의 형상이 부족하지만 내재(內在)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데아 세계와 현상계의 조화와 합일’을 역설했다. 

이처럼 찬란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도 16세기 초반에 이르면 쇠퇴하고, 그 중심지는 알프스 이북으로 이동했다. 15세기 말에 가시화한 유럽의 대서양세계 진출 여파로 지중해 교역이 시들해지면서 이탈리아 중북부 도시들을 강타한 경제력 쇠퇴가 중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재정적 후원이 줄어들면서 예술가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생계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갔다. 이때 알프스 너머 네덜란드 저지대지방이 예술과 학문 활동의 새로운 무대로 부상했다.

이른바 ‘북방 르네상스(Northern Renaissance)’로 불린 새로운 경향은 고전고대로부터 개혁의 영감을 구한다는 측면에선 이탈리아와 같았으나 그 대상에서는 본질적 차이가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고전고대의 학문과 예술에 주목한 데 비해 북방 휴머니스트들은 종교적 측면을 중시하고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의 기풍을 되살리려 했다. 무엇보다 성서 원본의 정확하고 세밀한 연구를 통해 중세시대 오류를 찾아냄으로써 원전에 충실한 성서 재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북방 르네상스의 근본 정신은 ‘기독교적 휴머니즘(Christian Humanism)’으로 불린다.

이런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은 북방 ‘휴머니스트의 왕’이란 닉네임을 가진 네덜란드 출신의 에라스뮈스였다. 당대 유럽 최고 지성인으로 꼽힌 그는 그리스도교 초창기의 헬라어(그리스어) 원전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신약전서』(1516)를 편찬하고, 동시에 『우신(愚神)예찬』을 비롯한 다수 저술로 당시 가톨릭교회의 부패상을 비판·고발했다.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채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의 부패와 비합리성을 날카롭게 지적한 르네상스 정신이야말로 서양 근대화의 서막을 여는 변혁의 신호탄이었다.

르네상스는 이후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르네상스는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로 향하는 창문을 열었다. 르네상스가 중세문화와 어느 정도나 다른지를 두고 학자들 간에 논쟁이 이어져 왔으나 어쨌든 르네상스가 교권 중심의 중세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시도라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봄’에서 중세와는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고,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는 담담하게 신을 응시하고 있는 인간 아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경우 상층 엘리트 중심의 문화예술운동이었다는 한계성은 있으나 이것이 알프스를 넘어선 이후엔 상공계층까지 저변이 확대됐다. 무엇보다 르네상스는 휴머니즘, 즉 중세 신의 권위에 눌려 있던 인간성을 해방했다. 르네상스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감정과 이성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지적 무대를 얻었고,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후대로 이어져 서양 근대화의 지성적 기초를 놓았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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