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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의 ‘펜 들고 세계 속으로’] 며칠 만에 밟은 땅이 출렁출렁?…‘땅 멀미’였다

입력 2024. 04. 12   16:44
업데이트 2024. 04. 1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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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해군순항훈련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②

10월 중순임에도 춥고 눈까지 내려
한국 버스 수입 안내판 안 떼고 운행
3개 대학 한국학과 개설 높은 관심
마카로프 해사 장비 노후·시설 열악
사물놀이 공연 등으로 한국 문화 알려

 

2002 해군순항훈련함대의 블라디보스토크 입항을 환영하는 행사에서 우리 교민과 러시아 관계자들을 위한 군악 공연이 열리고 있다.
2002 해군순항훈련함대의 블라디보스토크 입항을 환영하는 행사에서 우리 교민과 러시아 관계자들을 위한 군악 공연이 열리고 있다.



함정에서 입국 절차를 마치고 땅을 밟았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얼마 걷지 않아 땅이 출렁출렁한다. 지진이 발생했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나만 느낀 건가? 내가 그렇게 예민한 사람은 아닌데.”

계속되는 흔들림에 참다못해 옆에 있던 일행에게 물어봤다. “땅 흔들리는 것이 느껴지지 않느냐고.” 하지만 다들 괜찮단다. 나만 그런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원인은 땅 멀미. 오랜 항해로 흔들림에 익숙해진 감각기관이 정지 상태의 육지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다. 신기한 노릇이다. 평생 단단한 땅을 딛고 살아온 사람이 며칠 배 좀 탔다고 땅 멀미를 겪다니!

10월 21일 도착한 세 번째 기항지였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첫 기억은 그렇게 강렬했다. 다행히도 땅 멀미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날씨는 10월 중순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추웠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푸근한 날씨였다는데. 도착한 날은 눈까지 내렸다. 첫눈이란다.

시내를 둘러본다. 운행하는 버스를 보니 부산에 온 줄 알았다. 감만동, 다대포, 광복동이라는 목적지 표시가 보인다. 부산지역에서 운행하던 버스를 그대로 수입해 쓰고 있던 것이다. 한두 대가 아니다. 30%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여기에 정겨운 사투리까지 들렸으면 딱인데. 아파트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는 대부분이 LG였다. 외국에 나오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는데.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함상 리셉션에서 통역으로 지원 나온 러시아 여학생. 몇 년 뒤 한국 TV에서 우리나라로 유학온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함상 리셉션에서 통역으로 지원 나온 러시아 여학생. 몇 년 뒤 한국 TV에서 우리나라로 유학온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눈이 내린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전경.
눈이 내린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전경.



지금은 달라졌지만, 당시 이곳에서는 영어가 영 맥을 못 추는 언어였다. 한때 미국과 함께 세계를 나눠 지배했다는 자존심 때문인지, 특정인을 제외하고는 영어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 영어로 대화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대신 극동대·극동공업기술대·경제대 등 3개 대학에 한국학과가 개설돼 우리 말을 배운 학생들을 지속해서 배출함으로써 교민들 사이에서는 영어보다 한국어로 말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는 농담이 있다고 했다.

한국학과의 영향일까?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국에 관심이 높았다. 함상 리셉션에 통역으로 지원 나온 러시아 여학생도 그랬다. 그녀의 꿈은 한국으로 유학을 가 한국어를 더 열심히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몇 년이 흘러 국내 한 방송사의 TV 프로그램에 나온 그 학생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바라던 소원을 이뤘던 그 학생은 지금은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사실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 해군과 오래된 인연이 있다. 북방함대 다음으로 러시아 해군에서 가장 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다는 태평양함대가 있어서다. 1990년 러시아와 수교를 맺고, 1993년 이수용 전 해군참모총장(당시 소장)이 전남함·울산함을 이끌고 처음으로 방문했다. 이번 방문은 이후 여섯 번째이자 순항함대로서는 다섯 번째였다.

덕분에 러시아 사관학교 중 유일하게 극동에 있다는 마카로프 해군사관학교(해사)와 태평양함대사령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우리 생도들은 생도관·박물관 등 시설 곳곳을 둘러보면서 실제로 함정을 강의실로 옮겨 놓은 듯한 실습교재를 보고, 실습 위주의 교육체계에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장비가 노후한데다 생도 복지시설도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러시아 태평양함대사령부를 방문한 순항훈련함대원들을 환영하는 가무단의 앙상블 공연.
러시아 태평양함대사령부를 방문한 순항훈련함대원들을 환영하는 가무단의 앙상블 공연.



마카로프 해사 강당에서 펼친 우리 순항함대의 의장대 시범과 군악대의 신나는 연주, 그리고 홍보단의 사물놀이는 러시아 생도들과 주민들에게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3박4일의 체류 일정을 마치고 다음 기항지인 괌으로 향하면서 태평양함대 소속 함정과 기동·기류훈련을 통해 군사협력을 다지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여담이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 순항훈련 내내 동행한 시인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이 한마디 했다. “모름지기 글을 쓰는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를 체험해야 작가적 상상력이 높아진다”라고. 일행 모두를 순식간에 의기투합하게 만든 마법의 문장이었다.

그래서 찾아가 본 곳이 사우나다. 뜨거운 돌에 물을 부어 생긴 증기로 몸을 데우고, 차가운 바다에 입수한다는 전통의 반야(Banya)와는 다르다. 사우나에 여러 시설이 혼재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들어가니 한편에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과 맥주·보드카 등 각종 술이 들어있는 냉장고가 있다. 15m 길이 정도의 수영장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사우나와 몸을 씻을 수 있는 샤워기도 있다. 요즘에는 노래방 기계도 설치됐다고 한다. 한 공간에서 사우나와 수영, 간단한 식사, 노래까지 논스톱으로 모두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설은 러시아 곳곳에 있다. 길고 긴 겨울과 밤, 매서운 한파와 추위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긴 듯하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정을 나누고 친목을 다지는 장소로는 적격이다.

그리운 추억의 블라디보스토크. 지금도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그곳으로 떠나고 싶은 여행객의 발을 잡는다. 전쟁이 빨리 끝나고 평화가 오기를. 안심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한번 갈 수 있기를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이주형 기자는 1995년 국방일보에 입사해 10여 회에 걸쳐 해외파병부대를 취재하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국군의 활약상을 보도했다. 현재는 대통령실 출입기자로 있다.
이주형 기자는 1995년 국방일보에 입사해 10여 회에 걸쳐 해외파병부대를 취재하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국군의 활약상을 보도했다. 현재는 대통령실 출입기자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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