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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의 ‘펜들고 세계속으로’] 두려움과 설렘 속 115일간 9개국 13개항 대장정 시작

입력 2024. 04. 05   15:33
업데이트 2024. 04. 0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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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의 ‘펜 들고 세계 속으로’
2002 해군순항훈련 - 일본 도쿄와 구레 

진해 출발 첫 기항지 일본 도쿄 도착 

12개국 참가 관함식 통해 친선 다져
야스쿠니 들렀다 참배객 오해 받기도
두 번째 기항지 구레는 주정 이용 상륙
인근 히로시마 원폭돔 당시 참상 증언

일본 요코스카항에 전시된 미카사함 앞에서. 미카사함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받은 배상금으로 영국에 주문·건조한 함정 중 하나다.
일본 요코스카항에 전시된 미카사함 앞에서. 미카사함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받은 배상금으로 영국에 주문·건조한 함정 중 하나다.


1964년 창간한 국방일보는 언제, 어디서나 국군 장병과 함께했습니다. 그 발걸음은 국내를 넘어 해외파병 현장까지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베트남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소말리아·동티모르·이라크 파병 때도 동고동락했습니다. 현재진행형인 남수단(한빛부대), 레바논(동명부대), 아랍에미리트(UAE·아크부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 창간 60주년을 맞아 수많은 현장에서 적은 기록을 일부나마 소개합니다. 2002년 해군순항훈련부터 2023년 레드플래그 알래스카(Red Flag Alaska) 훈련까지의 여정을 매주 월요일 지면을 통해 찾아뵙겠습니다. 

첫사랑, 첫출발, 첫여행…. ‘첫’이라는 단어에는 왠지 모를 애틋함과 추억이 있다. 그래서 더욱더 오래 기억되고 생각할 때마다 그리움에 젖게 한다. 나에겐 2002년 10월 8일이 바로 그런 날 중 하나다. 국방일보 입사 후 첫 해외 출장이자 115일간 9개국 13개 항이라는 대장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순항훈련 일정은 이러했다. 진해 군항→도쿄·구레(일본)→블라디보스토크(러시아)→괌(미국)→타히티(프랑스)→발파라이소(칠레)→카야오(페루)→과야킬(에콰도르)→푸에르토케살(과테말라)→아카풀코(멕시코)→로스앤젤레스(미국)→하와이(미국)→사이판(미국)→진해 군항.


원폭기념공원에 있는 히로시마 원폭돔.
원폭기념공원에 있는 히로시마 원폭돔.




10월 8일 장정길 해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열린 환송식 종료 후 진해 군항을 출발한 순항훈련함대는 3척으로 구성됐다. 4200톤급 군수지원함(AOE) 천지함. 최초의 한국형 구축함(DDH-Ⅰ·3200톤급) 광개토대왕함, 1500톤급 호위함(FF) 제주함이다.

기함(旗艦·지휘함)인 천지함에 승함했다. 배정받은 선실은 2인실. 예전 선배들은 10인실, 기껏해야 4~5인실이었는데 뜻밖의 환대다. 같이 선실을 쓰는 장교와 인사를 나눴다. 기무사령부(현 방첩사령부) 소속이다. 기자와 기무, 기 자 돌림이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 不可遠). 두 직종 모두 군과는 가까이하기도, 멀리하기도 그런 관계라서 같은 방에 몰아준 것인가? 어쨌든 2인실이니 좋다. 화장실과 샤워실도 있는 독립된 공간이다. 함에서 이렇게 쓸 수 있는 것은 사령관실과 함장실뿐이다.

사실 떠나기 전부터 두 가지 감정이 공존했다. 100일이 넘는 장기간의 항해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낯선 신세계를 알아본다는 설렘이었다.

이런 상반된 감정이 오가는 중에 이틀의 항해를 마친 함대는 10일 첫 기항지인 일본 도쿄(東京) 하루미항에 첫발을 내디뎠다. 여기에서의 주 행사는 관함식이다. 세계 각국의 해군 함정이 모여 실시하는 해상사열이 관함식이다. 이번 행사는 해상자위대 창설 50주년을 기념해 열렸다.

관함식 전 도쿄 시내를 둘러보다 야스쿠니 신사를 발견했다. 그 자리에는 당시 관함식을 취재하러 온 국방부 출입 신문·방송 매체 기자들이 함께였다. 일행 중 한 명이 신사 관계자에게 영어로 안쪽을 관람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관계자가 영어를 몰라 의사가 안 통했다. 다만 손짓·발짓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며 표시했다. 눈치를 보니 우리를 참배객으로 오해했고, 자기를 따라 행동하라는 것 같았다. 계속 있다 보면 참배까지 이어지겠다 싶어 일제히 손을 내저으며 빠져나왔다. 신사 참배라니, 그것도 야스쿠니를. 두고두고 입방아에 오를 뉴스 제공자가 될 뻔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다.

순항훈련 당시 배포한 기항지 안내서.
순항훈련 당시 배포한 기항지 안내서.

 



13일에는 관함식이 거행됐다. 대한민국 해군을 비롯해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 24척과 해상보안청 경비정 1척, 미 해군 알레이버크급 이지스구축함 존 S. 매케인함, 호주·러시아·프랑스 등 12개국 42척의 함정이 해상사열을 하며 친선을 다졌다.

이외에도 순항훈련함대는 함정 공개 및 교민 위문, 군악 공연, 호주·뉴질랜드·태국·싱가포르·프랑스·러시아·인도·일본 등 8개국과 탐색·구조훈련(SAREX)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도쿄를 떠난 순항훈련함대가 향한 다음 기항지는 구레(吳). 제2차 세계대전 때 거포를 장착한 전함 야마토함이 진수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인근 에타지마에는 해상자위대 초급간부들을 교육하는 간부후보생 학교와 포술·어뢰·소해·항해·통신·잠수 등의 병과를 교육하는 제1술과학교가 있다.

구레에서는 투묘(投錨)를 했다. 투묘는 부두가 없거나 기상 악화 등의 이유로 정박할 수 없는 경우 닻을 해저에 내리고 고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 주정(舟艇)을 이용해 상륙했다.

구레에 왔다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다. 40여 분 정도 기차를 타고 가면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장소. 바로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로 유명한 히로시마, 그중에서도 원폭돔이다. 원래 ‘산업장려관’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건물이었던 원폭돔은 1945년 8월 6일 원폭 투하와 더불어 전 세계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히로시마의 상징물이 됐다. 돔 부분의 철골만 앙상하게 남긴 채 무너진 돔은 아직도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원폭돔이 있는 기념공원에는 원폭 어린이 상과 한국인 피폭자 위령비 등 기념 조형물이 곳곳에 설치돼 있다. 특히 자료관에는 폭파 때 발생한 열에 녹아버린 기와·유리, 폐허가 된 히로시마시 모형 등이 있어 방문한 이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당시 절찬리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야인시대’도 기억에 남는다. 함정 사관실에서 ‘본방 시청’이 가능했다. 지금이야 유튜브 등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그땐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방송국에서 송출한 전파가 이곳까지 도달한 덕분이다.

가깝고도 먼 한국과 일본. 서로의 문화와 사상은 다르지만, 물리적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음을 구레에서 체감했다. 사진=이주형

 

이주형 기자는 1995년 국방일보에 입사해 10여 회에 걸쳐 해외파병부대를 취재하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국군의 활약상을 보도했다. 현재는 대통령실 출입기자로 있다.
이주형 기자는 1995년 국방일보에 입사해 10여 회에 걸쳐 해외파병부대를 취재하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국군의 활약상을 보도했다. 현재는 대통령실 출입기자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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