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서양세계의 지적 뿌리를 찾아서
7. 서양 근대사상의 뿌리-르네상스 휴머니즘(상)
인간 주체로 인식…서양 근대화 시작
개인주의·합리주의·과학사상 발현
십자군 원정 이후 지중해 교역 살아나
상공인 계층 등장…개인 능력 중시해
메디치 가문 등 후원까지 이어지며
이탈리아 중북부서 르네상스 꽃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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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500년이 지난 서기 1000년경 그리스도교 유럽은 이슬람이나 중국 등 당대 세계의 다른 문명권과 비교했을 때 지성은 물론 다른 분야에서조차 한없이 왜소해지는 낙후지역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로부터 500년 후인 서기 1500년경 유럽세계가 기세등등하게 등장했을까?
중세를 호령한 교회의 영향력은 14세기 말에 이르러 쇠퇴하고 점차 근대화를 향한 새로운 기운이 일어났다. 중세 1000년을 지배한 믿음과 신앙 위주의 헤브라이즘 시대가 저물고 긴 세월 동안 거의 잊히거나 적어도 뒤편으로 밀려나 있던 그리스·로마시대 인간 이성 위주의 헬레니즘적 사조가 재차 살아났다. 수면 아래에 잠복하고 있던 변화의 흐름은 15세기경 표면으로 본격 분출되기 시작했다. 서양 근대화의 시발점으로 여겨지는 르네상스(Renaissance)가 도래한 것이다.
르네상스는 ‘부활’ 또는 ‘재생’이라는 뜻으로 신 중심의 중세문명에서 인간 중심적인 고전문명(그리스·로마문명)의 재도래를 의미했다. “인간은 원죄를 갖고 태어났다”는 신학사상 대신 “인간도 고귀하다”는 휴머니즘(Humanism)의 회복으로 요약할 수 있다. 르네상스 초기에는 고전고대의 문헌이나 예술작품의 수집·연구가 주를 이뤘기에 무엇보다 원전(原典)의 수집과 필사에 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러다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한 문학운동에서 벗어나 지적(知的) 운동으로 발전, 개인 이성의 발현을 통한 창조적 행위자로서의 인간관을 강조했다. 이는 인간을 단지 ‘신의 수동적 피조물’로 인식한 중세 인간관과는 전혀 다른 관점이었다. 이제 인간은 자의식을 지닌 주체로서 개성을 추구하고 비판정신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서양을 근대화로 이끈 개인주의, 합리주의, 과학사상이 움텄다.
이처럼 중세 신의 권위로부터 인간성 해방을 추구한 휴머니즘을 핵심 원리로 삼은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반도 중북부 도시들(피렌체, 로마, 베네치아, 밀라노 등)에서 맨 먼저 그 꽃을 피웠다. 예컨대 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 같은 미술가, 마키아벨리 같은 사상가, 갈릴레오 같은 과학자 등 일일이 거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인재가 대부분 15세기 중반기 피렌체에서 태어나고 실력을 쌓아 16세기 전반기 각자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들이 남긴 지적 유산에 힘입어 오늘날 인류 문명은 더욱더 다채롭고 풍요로워졌다.
르네상스가 신 중심의 중세와 구별되는 아주 새로운 시대라는 개념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학자는 19세기 중엽 스위스 바젤대에서 학문을 가르친 야코프 부르크하르트(Jacob C. Burckhardt·1818~1897)였다. 그는 1860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통해 근대 시작점으로서 르네상스 개념을 확립했다. 이에 대해 일단의 중세 연구자들은 르네상스가 새로운 시대이긴 하나 무(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중세 이래 축적돼 온 지성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러한 점에서 역사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임을 강조했다. 실제로 앞선 글에서 대략 살펴본 바와 같이 중세 전성기에 접어들면서 그리스·로마문명이 잉태한 지성의 유산은 나름 활발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중세 역사 연구자들의 주장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지성의 제반 측면에서 르네상스가 중세와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중세 지식인도 고전시대의 저술가들과 이들의 작품을 알고 있었으나 이는 극히 한정된 저명 인물들에 국한돼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엔 고전시대 이·삼류 지식인들 및 이들의 작품과도 친숙해졌다. 고전문화는 중세에도 소개되고 그 진가를 인정받았으나 르네상스 때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단순한 장식물에 불과했다. 이와는 달리 르네상스에서의 고전고대는 다이내믹한 추동력이자 당대인들이 모방하려는 모범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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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종교 측면에서 르네상스 시대는 보티첼리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듯이 중세에 비해 훨씬 이교적(異敎的) 색채가 짙었다. 무엇보다 휴머니즘의 영향 아래 르네상스 시대에는 문학, 수사학, 역사학, 윤리학 등이 교육 프로그램으로 중시됐다. 상대적으로 스콜라 철학의 핵심 과목으로 중세 지적 훈련의 중심이었던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뒷전으로 밀리게 됐다. 오늘날 네덜란드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명 ‘북방 르네상스’에선 성서 원전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초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당대 가톨릭교회의 부패상을 비판하는 사회개혁의 모티브를 찾았다. 이처럼 각 분야에서 봇물처럼 샘솟은 르네상스의 지적 조류는 서양 근대화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왜 이 시기에 각 분야 거장(巨匠)들은 대부분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에서 배출됐을까? 지성사의 신조류는 왜 이탈리아반도에서 선행(先行)됐을까? 우선, 문명화를 도시화로 정의할 경우 이탈리아는 중세 말기에 유럽에서 도시화가 가장 빨랐던 지역이었다. 11세기 말 이래 약 200년에 걸쳐 유럽인이 행한 십자군 원정 덕분에 원래 의도와는 달리 7세기 중엽 이래 이슬람세력에 의해 닫혀 있던 지중해 교역이 되살아났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본 곳이 바로 지중해 주변에 있던 이탈리아 중북부 도시들이었다.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이들 도시에선 일찍부터 상공인 계층이 등장했다. 여전히 중세적 전통에 얽매여 있던 알프스 이북 지역과는 달리 이탈리아에서는 귀족들도 시대적 변화에 솔선해 동참했다. 도시의 공적 업무에 적극 참여했고, 심지어 부유한 상인들과 교류하는 단계를 넘어 귀족 본인이 직접 상업활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타고난 혈통보다 각자의 능력이 출세나 축재를 보장했기에 자연스럽게 자기계발을 위한 학문이 인기를 끌었다.
르네상스 선행의 또 다른 이유로, 각 도시에서 출현한 유력 가문과 이들의 예술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꼽을 수 있다. 은행업으로 축재한 메디치(Medici) 가문이 자신의 터전인 피렌체를 위해 부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각 분야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예술가나 학자들 중 상당수가 피렌체 출신인데, 이들은 대부분 메디치 가문에서 후원받은 바 있었다. 로마에서는 율리우스 2세(재위 1505~1513), 레오 10세(재위 1513~1521)와 같은 교황들이 신축한 성 베드로 대성당 장식을 위해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했다.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 도시들은 유럽의 다른 어느 도시보다 부유했다. 피렌체는 모직물 산업과 금융업으로, 베네치아는 동방과의 향신료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자부심으로 가득 찬 도시민들이 경쟁적으로 자신이 속한 도시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데 열을 내면서 당연히 예술활동이 활기를 띠었다.
끝으로, 지리적 위치상 이탈리아 도시들은 일찍부터 고전문화에 친밀해져 있었다. 도심에는 고대 로마의 기념물이 산재해 있었고, 로마시대 문헌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특히 그리스반도 및 당시 그리스문화를 보존·발전시켜 온 비잔티움제국과 인접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직접 아테네나 비잔티움을 방문해 고전 그리스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고 관련 문헌을 입수하기가 용이했다. 심지어 15세기경부터는 비잔티움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건너와 고전시대 그리스 학문을 전수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이탈리아반도에서 만개한 르네상스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는 다음 회에서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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